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상엽 (문단 편집) === 독립 운동 === 1943년 [[김책공업종합대학|평양 대동공업전문학교]] 채광과를 졸업한 후 1944년 1월에 일본군 평양사단내 42부대에 강제 징병되었다. 당시 일군 평양사단은 42·43·44 보병부대 및 47포병부대와 48공병부대, 50치중병부대 등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들 부대에 각기 배속되었던 학병들은 동년 7월에 초년 훈련병의 과정을 마치고 어느 정도 병영생활에 익숙하게 되자 42부대를 중심으로 집단항쟁을 계획하였다. 이때 전상엽은 [[김근배(1919)|김근배]], [[김완룡]](金完龍), [[최홍희]], [[최정수(1922)|최정수]],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8845|김윤영]](金允永), [[https://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pageTitle=Report&mngNo=94|박성화]](朴性和) 등과 함께 모의를 거듭하고 동년 8월부터는 동지포섭 등의 항쟁준비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평양사단내 각부대 학병들은 긴밀한 연락망을 구축하였는데 그는 학병항쟁 조직의 작전참모로 활약했다. 또한 그는 학병항쟁의 계획으로 평양사단 병영폭파 등을 주장하였으나 폭약과 탄약의 입수가 어려운 실정이었으므로, 일단 부대탈출 후 조선-[[만주국]] 국경지대와 부전고원 등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때를 기다려 평양사단을 폭파하기로 하였다. 이들은 1944년 10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진행했는데 날짜가 임박해지면서 각 부대간의 연락이 제대로 되지않아 부득이 거사일을 한달 뒤인 11월 1일로 연기하였다. 그러던 중 이러한 계획을 탐지한 한인 헌병보조원이 그 사실을 일본군 헌병대에 밀고하였고, 또 학병동지인 김완룡이 일본군 상관을 구타한 일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평양사단의 학병항쟁계획이 드러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체포된 그는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가 자신을 감시하던 일본 헌병을 때려눕히고 탈옥에 성공한 뒤, 중국 방면으로 탈출하고자 했으나 2개월 만에 조선-[[만주국]] 국경지대에서 일본 군경에 체포되었다. 1945년 6월 10일 열린 일본 제국 육군 조선군관구 임시군법회의 평양사관구법정에서 이른 바 [[치안유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1945년 [[8.15 광복]] 직후 출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