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상국 (문단 편집) == 생애 == 1940년 3월 24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홍천)|내촌면]] 물걸리 동창마을에서 아버지 전석주와 어머니 박춘봉 사이에서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8살 때까지 쓰던 아명은 전일랑이다. 아버지 전석주는 [[제재소]]에서 [[경리]] 업무를 보았다고 한다. 4살 되던 1943년 [[홍천읍|홍천면]] 연봉리 연봉삼거리 인근으로 이주해 1년 정도 살다가 이듬해인 1944년 옛 [[홍천경찰서]][* 홍천읍 태학리에 있는 지금의 [[홍천경찰서]]는 2003년 7월 7일 [[https://www.gwpolice.go.kr/hc/sub05/sub05_01_01.jsp|준공돼]] 이전한 것이고, 옛 홍천경찰서는 지금의 신장대리 [[https://naver.me/x2PoK7oT|홍천읍행정복지센터]]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176351|자리에 있었다]].] 건너편인 홍천면 신장대리 63-3번지[* 이 지번에는 나중에 [[대한민국 육군|육군]] [[헌병대]]가 들어왔다고 하며, 현재는 [[https://naver.me/FPs8tJWe|K컨벤션 웨딩홀]]이 들어서 있다.]로 이주했다.[* 당시 집 근처에 [[https://terms.naver.com/entry.naver?cid=46656&docId=528757&categoryId=46656|홍천 희망리 당간지주]]가 있었다고 한다.] 9살 되던 1948년 홍천국민학교에 입학했다가, 11살 되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 집이 전소되었다. 이에 고향으로 피난해 그곳에서 동창국민학교로 전학했고, 1951년 [[1.4 후퇴]] 때 [[홍천강]] 다리를 건너 피난민 대열에 끼어 한때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영운동]]에 있던 [[http://www.cbi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5926|피난민 수용소]]에서 생활하기도 했고, 어느 폐광촌에서 [[장티푸스]]로 온 가족이 고생하기도 했다. 이때의 기억이 훗날 《잊고 사는 세월》 등의 작품에도 나타난다. 1952년 고향으로 돌아와 다시 국민학교를 다녔고, [[정전 협정(6.25 전쟁)|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1954년 다시 홍천면 읍내의 연봉리로 이주했다. 1955년 3월 홍천중학교에 입학했는데, 이때부터 책을 좋아해서 재학 시절 마침 문예부가 창설되자 이에 들어가 [[레프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허균]]의 《[[홍길동전]]》 등을 비롯해 [[이광수(소설가)|이광수]]의 역사소설과 [[아서 코난 도일]]의 탐정소설, [[모리스 르블랑]]의 [[아르센 뤼팽 시리즈]] 등을 구입해 탐독했다고 한다. 이후 홍천면 희망리 [[홍천여자고등학교]] 인근, 희망리 홍천성당 앞, 희망리 [[https://naver.me/FhdYcC7u|동광연립]], 희망리 잿골 입구 [[https://naver.me/FFip9bRX|토우아파트]] 등 7차례에 걸쳐 이사를 다니며 홍천면 읍내에서 계속 살았다.[* [[http://www.hcsinmo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43|전상국 작가와 홍천중학교 동창인 강정식 시인의 회고]], [[https://www.poemhouse.kr/library/1858|우리시대 우리작가 - 전상국 (문예2000 - 2000년 12월호)]]] 이후 1957년 [[사범학교]]에 진학하라는 부모님의 권유를 뿌리치고 [[춘천고등학교]]로 진학해 1학년 때 담임이던 시인 이희철의 지도를 받으며 동창생 [[이승훈(시인)|이승훈]]과 시를 짓는 등 문예 활동에 관심을 가졌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봉의문학회', '예막문학회' 등의 동인 활동을 하면서 소설 《산에 오른 아이》, 소설 《황혼기》 등을 습작으로 썼는데, 이것들이 각각 제6회 학원문학상 3위와 [[강원일보]] 신춘학생문예 가작 등으로 입선하면서 작가가 될 뜻을 굳혔다. 1960년 춘천고등학교 졸업 후 소설가 [[황순원]]이 교수로 재직하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해 황순원의 지도를 받았고, [[성북구]] [[석관동]]에서 [[이성부]] 시인 등과 함께 자취를 하며 학교를 다니다가 1963년 졸업했다. 학부 재학 시절 습작을 계속 집필해 제6·7회 경희대학교 문화상을 휩쓸며 학비를 면제받기도 했는데, 졸업하던 해에도 학부 재학 시절 쓴 소설인 《동행(同行)》으로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부문에 당선되어 정식 소설가로 [[등단]]하였다. 그 뒤 1960년대 중반 [[봉사활동]]으로 홍천면 결운리에 있던 상록재건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며, 1964년 [[원주시]] [[육민관고등학교]]에 정식 [[교사]]로 임용돼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강원도 [[춘천시]]·원주시의 여러 [[중학교]]·[[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로 근무했으며[* [[춘천중학교]] 교사 시절 제자 중 한 명이 [[최승호(시인)]]이다.], 1972년부터는 [[조병화]]의 부름으로 [[서울특별시]]로 전근을 가서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를 거쳐 [[경희고등학교]]에 부임했다. 한편, 1963년 등단해 1964년 2월 단편 《관망》(「[[현대문학]]」), 1966년 1월 단편 《해바라기 시계》(「문학춘추」)를 발표한 뒤 9년 동안 소설을 쓰지 않다가 1974년 가을 [[계간]] 「[[창작과비평]]」에 단편 《전야(前夜)》를 발표하며 문단에 컴백하였고, 1975년 한국문인협회에 가입한 후부터는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0대 시절 6.25 전쟁을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실향의식, 뿌리 찾기 등의 주제를 소설에서 꾸준히 다루었고, 또한 교사로서의 경험을 살려 학교 관련 소설도 많이 썼는데, 관련 작품으로는 《돼지 새끼들의 울음》을 비롯해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우상의 눈물]]》''' 등이 있다. 1982년 [[경희대학교/대학원|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고, 1983년 [[중랑구]] [[중화동]] 286-7번지로 이주해 전업작가를 꿈꾸었다. 경희고등학교를 끝으로 1984년까지 교사로 근무했다. 1985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 전공으로 [[국어국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같은 해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조교수]]로 임용돼 2005년까지 재직하다가 [[정년퇴직]]했다. 재직 시절이던 1990년 [[한국소설가협회]] 운영위원, 1995년 한국문인협회 [[이사(직위)|이사]] 등으로 활동한 바 있으며, 2000년 한국문인협회 강원도지회장에 선출되었다. 특히 2002년 8월 6일 춘천시 [[신동면]] 증리에 [[김유정문학촌]]이 개관하자 초대 촌장에 [[http://www.kimyoujeong.org/theme/basic/html/intro/history.php|취임해]] 2009년 12월까지 역임했다. 2010년 1월부터 2019년 12월까지 김유정문학촌 촌장의 위촉 절차 없이 [[사단법인]] [[김유정기념사업회]]에서 문학촌을 수탁단체의 자격으로 운영하게 되자, 2010년 1월부터 2018년 7월까지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을 [[http://www.kimyoujeong.org/theme/basic/html/intro/history.php|지내며]] 김유정문학촌을 운영했다. 또한 [[김유정문학상]] 1회~11회까지의 [[심사위원]]을 지냈고, 현재 김유정기념사업회의 명예이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2014년에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 [[금병산]] 자락에 자택을 짓고, 그 옆에 사비를 들여 '[[https://naver.me/GaM9AIJK|전상국 문학의 뜰]]'이라는 서재 겸 문학관을 지었으며, 현재는 강원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2018년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b04d3344a|대한민국 예술원]] 문학 분과의 소설 분야 회원으로 [[http://www.naa.go.kr/site/main/naa/member/view?memId=518|선출되었고]], [[보관문화훈장]]을 수훈받았다. 2023년 인터뷰에 의하면 근감소증 진단도 받고 [[허리]] 수술도 해서 건강이 안좋다고 한다. [[https://www.kwnews.co.kr/page/view/2023061513345446978|#]]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