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량(오호십육국시대) (문단 편집) === 쇠퇴기 === 장중화의 시대 후반부터 전량의 쇠퇴기가 시작된다. 오호십육국시대가 어느 정도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관중지역을 차지한 후 서량을 본격적으로 목표로 삼고 완전정복하려는 국가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이미 후조의 12만 대군이 침공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애라는 명장을 등용한 것에 힘입어서 운수좋게 승리하자 장중화가 정치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던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전량의 명장인 사애(謝艾)를 주천(酒泉)의 태수로 좌천해서 내보낸 일인데 이렇게 된 이유는 사애를 시기하는 사람들의 참언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더해서 [[전진(오호십육국시대)|전진]]을 초기에 제압하지 못하고 대패한데다가 재위 7년만에 중병에 걸려서 급사하는 바람에 [[장요령]]이 급하게 대를 이어나가게 된다. 장요령은 정말로 운수가 안좋았다. 353년 10월에 장중화가 병에 걸리자 그제서야 태자에 책봉되었으나 11월에 장중화의 병이 위중해졌는데 장중화가 그 전에 서형인 [[장조(전량)|장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서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총신들과 몰래 의형제를 맺을 정도로 주변을 모조리 장악했기 때문에 장요령은 즉위시부터 누구에게도 의지를 할 수 없는 허수아비 왕이 된 것이다. 장중화도 다 죽어갈 때에서나 이런 위험성을 인식하고 좌천했던 사애를 다시 중앙으로 불러서 위장군으로 삼고 장요령을 보좌하면서 조정의 중책을 담당하게 하려고 했지만 이미 장조가 장중화의 조서를 멋대로 탈취해서 안보낼 정도니 답이 없었다. 결국 장요령은 재위 1개월도 안된 상태에서 폐위당하고 장조가 즉위한다. 장조는 개인적인 능력은 있고 정무도 잘 처리하는 편이었으나 그런 능력을 엉뚱한 곳에 사용하여 간통, 강간등 황음무도한 짓을 자주하는 데다가 제대로 된 사전조치를 하나도 안하고 종묘와 백관을 설치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연호를 화평(和平)이라고 독자적으로 정하여 외국에 공식적으로 알려질 정도까지 널리 선포함으로서 그 동안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던 전량 내부의 민심과 외부 외교관계를 모조리 파탄낸다. 당장 353년에 장조가 비합법적이고 비정통적인 방법으로 즉위했으면 눈치를 보고 안과 밖을 안정화시킨 후에 공적까지 세워야 가능할 듯 말듯한 황제 즉위와 독자 연호 선포를 불과 1년 후인 354년에 시행했으니 민심이 분열되었으며 외교적으로도 타국과 마찰이 발생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354년 5월에 전량에 [[서리(날씨)|서리]]가 크게 내려 농작물들이 모두 죽고 백성들이 굶주리기 시작했다. 덕분에 355년부터 대규모의 반란이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그 시작도 평소 싫어하던 친척인 하주자사 장관(張瓘)을 [[차도살인]]하려다가 계획이 들통나서 역습을 당하면서 발생하였다. 너무나도 다급한 나머지 반란군이 옹립하려던 전임 국왕 장요령을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서 반란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결국 옥좌에서 끌려내려와서 병사들에게 난도질 당하면서 장조는 처참하게 죽는다. 그 이후에는 장중화의 차남인 [[장현정]]이 즉위한 후 칭제를 취소하고 연호도 이전에 쓰던 건흥(建興)으로 되돌렸으나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옹립되었다는 한계가 있어서 공신들끼리 내전이 시작되었으며 결국 장조의 동생인 [[장천석]]이 순차적으로 2번 [[쿠데타]]에 가까운 정변을 벌여서 장현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른다. 이런 과정으로 전량이 내분에 빠지면서 제 살 깎아먹기 식으로 국력을 낭비하는 동안 외부 환경이 바뀌기 시작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