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전국체육대회 (문단 편집) == 역사 == 1920년 당시 조선체육회로 불리웠던 대한체육회가 창립 당시에 시작했다. 이 당시 [[조선총독부]]가 이전의 헌병경찰통치를 끝내고 문화통치로 전환하면서 조선인들의 체육증진과 식민지가 되었던 조선의 화합과 단결을 하는 취지에 따라 전국 시도를 중심으로 체육 대회를 시작했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 전국체전의 시초다. || {{{#!wiki style="margin:-5px -10px" [[파일:LYgONe8.png|width=350]]}}} || || --1920년 11월 4일에 열린 전조선야구대회.--[* 오랫동안 나무위키와 엔하위키에서 해당 사진이 1920년에 개최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라고 기술해오고 있으나, 1920년에 개최된 대회 장면이라는 근거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사진 속 지붕이 덮인 관중석에 그물망이 펼쳐져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동아일보의 1926년 12월 4일자에 보도된 경성운동장 야구장 관련 소식에 첨부된 사진을 참고하면, 해당 사진은 경성운동장 야구장일 가능성이 크다. 경성운동장 야구장은 1925년에 개장되었으므로, 해당 사진은 1920년에 개최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일 리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열렸는데, 당시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학교 운동장에 저렇게 규모가 큰 관람 시설 구비해놓은 학교는 드물다.] || 제1회 전국체전은 1920년 [[경기도]] [[경성부]](현재의 [[서울특별시]])에서 "전조선 야구대회"라는 이름으로 최초로 개최되었고 이 당시에는 배재고등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시작되었던 중소규모의 야구대회[* 중학부([[휘문고등학교 야구부|휘문고보]], [[중앙고등학교 야구부|중앙고보]], [[배재고등학교 야구부|배재고보]], [[보성고등학교(서울)|보성고보]], [[경신고등학교(서울)|경신학교]])와 청년부([[황성 YMCA 야구단|서울 YMCA]], 경신구락부, 천교도청년회, 배재구락부, 삼한구락부)가 진행되었다. 중학부에선 배재고보가, 청년부에서는 배재구락부가 우승했다.]였으며 종합경기대회로 전환된 것은 그 후로 5년 뒤 1925년부터였다. 여담으로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는 한반도 최초의 유료입장을 도입한 대회이기도 하다.[* [[한국야구사]] p.23] 또한 이때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가 1920년 11월 4일 제1회 [[전국체육대회|전조선야구대회]] 개막식에서 [[시구(야구)|시구]]를 했는데 이는 [[:파일:55621041_2114149048665178_7876549247212978176_n.jpg|한국야구사에서 가장 오래된 시구 기록이다.]] 1934년에 가서야 조선체육회가 창설 15주년을 맞이하면서 이 때부터 [[축구]], [[테니스]], [[육상]], [[농구]] 등의 경기가 추가되면서 15회 대회부터는 전조선(全朝鮮) 종합경기대회로 명칭을 바꾸고 진화하였다.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 대회 때 [[손기정]]의 [[일장기 말소사건]]이 발생하고 사건 당사자인 [[동아일보]]가 정간조치를 당하게 되면서 1938년에는 결국 조선체육회도 총독부의 훈령에 따라 강제해산되었고 전국체전도 18회를 끝으로 더 이상 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일부 스포츠 출신들이 강제 징병 및 징용을 당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올림픽도 2회 연속으로 개최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면서 총독부에 의해 강제해산되었던 조선체육회가 부활하게 되면서 그 해 12월부터 제26회 전국체전을 통해서 부활하게 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인하여 이 대회부터는 [[대한민국|남한]]의 지역단체 위주로 참가할 수 있게 되었다. 1948년에 열렸던 제28회 대회부터는 [[대한민국]] 정부 공인대회로 승인되기도 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때는 30회 대회가 열리지 못하였다가 1951년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에서 다시 대회가 열렸으며 이후부터는 [[서울특별시]]와 각 지방의 균등한 체육발전을 도모하고 전국체전의 취지에 맞추기 위하여 그 동안 [[서울특별시]]에서 연이어 개최하였던 전국체전을 지방으로 확대개최하였고 1957년 38회 대회는 [[경상남도]] [[부산광역시|부산]]에서 열렸다. 1961년 [[부산광역시|부산]]이 직할시로 승격됨에 따라 42회 대회는 [[부산광역시|부산직할시]]가 [[경상남도]] 시군 일원이 아닌 부산직할시 명의로 참가함에 따라 이 당시 [[서울특별시]]와 함께 독립 자치시 명의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1981년에는 [[경상북도]] [[대구광역시|대구]]와 [[경기도]] [[인천광역시|인천]]이 직할시로 승격되어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고 1986년에는 [[전라남도]] [[광주광역시|광주]]가 직할시로 독립 참가를 하였으며 1989년에는 [[충청남도]] [[대전광역시|대전]]이, 1997년에는 [[경상남도]] [[울산광역시|울산]]이, 2012년에는 [[충청남도]] [[연기군]]으로 있었던 [[세종특별자치시]]가 독립 참가를 하게 되었다. 국내 외에도 [[평안남도(이북5도위원회)|평안남도]], [[평안북도(이북5도위원회)|평안북도]], [[황해도]], [[함경북도(이북5도위원회)|함경북도]], [[함경남도(이북5도위원회)|함경남도]] 등 [[이북5도]] 선수단 및 재외동포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재외동포 선수단도 이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반면 대한민국 거주 외국인은 전국체전 특성상 아무리 한국에서 장기 거주중이고 영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출전 불가능.[* A지역에서 20년, 30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을 예로 들면 영주권 등 합법 체류자격을 가지고 있고 한 지역에서 오래 거주해도 한국으로 귀화하지 않는 한 지역 대표로 참가가 불가능하다는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