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적인걸 (문단 편집) == 생애 == 그는 [[누사덕]]의 추천으로 발탁되었고, 명경과를 거쳐 병주도독부법조를 지내다가 대리승[* 대리시(大理寺)의 승(丞)으로 주로 재판과 옥사(獄事)를 담당.]으로 옮겼고 [[676년]]에 권선재와 범회의 등이 소릉의 측백나무를 찍어버리는 죄를 저질러 [[고종(당)|당고종]]이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간언해서 영남에 유배를 보내는 것에 그치게 했다. [[679년]]에는 시어사를 지내면서 위홍기가 숙우, 고산, 상양 등의 궁을 만들자 사치를 부린다는 죄를 들어 탄핵했으며, 왕본립이 총애를 믿고 권세를 휘두르자 간사하다고 상주했고 당고종이 그를 용서했지만 끝까지 간언해서 죄를 얻게 만들었다. [[686년]]에는 영주자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울 정도였고 이 때문에 중앙으로 천거되어 동관시랑이 되었으며, [[688년]]에 강남도순무대사를 겸임하면서 오, 초 지역의 사당 중 1,700여 곳을 불태우고 하우[* [[우(하나라)]] 참조. 하나라의 시조 우임금으로 유명하며 [[요순시대|요와 순과 시대]]에는 명망 있는 사람에게 [[선양]]하는 방식으로 왕위가 이어져 자신도 순에게서 나라를 물려 받았지만, 우는 자신의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여 선양의 전통은 깨지고 왕조가 개막되어 적인걸은 우임금을 '''진정한 [[중원]] 왕조의 개창자'''로 보았다.], 오태백[* [[춘추시대]] [[오나라]]의 시조로, [[주나라]]의 추존 국왕이다. 태왕인 [[고공단보]]의 장남으로 주나라의 대를 이을 위치에 있었으나 넷째이자 막내 동생 계력의 아들 창이 뛰어난 재능을 보이자 창에게 나라를 잇게 하려고 스스로 계력을 추천하여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여 대를 잇게하였다. 자신이 남아있으면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 동생 계력이나 조카 창에게 정치적인 제약을 가할 것을 우려하여 당시로는 이민족들이 거주하던 오 지역으로 그의 일가족이 이주했다. 계력의 아들이 희창으로 바로 [[문왕(주)]]으로 문왕이 백부에 대한 그리움과 죄송스러움으로 백부의 가족을 모셔 편히 살게 하려고 하였으나 이미 이민족의 풍습이 자기 자녀들에게도 배여있다는 이유를 들며 주나라의 기풍에 흠집을 줄수 있다며 사양하고 일가족 전체가 오나라에 머물며 여생을 살다갔다. 이는 공자가 흠모한 [[주공단]]과 비견해서도 전혀 꿀리지 않는 감동적인 미담으로 오태백이 주나라를 떠나 오지역으로 이주할때 그를 따르던 무리들 전체가 그를 따라간 것도 오태백이 진정한 군자의 도리를 지녔다고 보아이러한 미덕을 젊어서부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적인걸은 오히려 공자가 흠모했던 주공단이 유학에 끼친 영향은 크지만 오태백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완전히 내려놓고 멀리 이탈한 것이 아니라 중앙 정계에 남아 섭정왕으로 활동한 전력도 있고 이후에도 조카인 [[성왕(주)|성왕]]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주공단이 성왕에게 권력을 넘긴 것도 명분이 없었다는 이유로 주공단을 위선적인 인물로 보아 진정한 도의와 대의를 위해 희생한 오태백을 주공단보다 더 높게 평가했다.], 계찰[* [[춘추시대]]가 끝나고 [[전국시대(중국)|전국시대]]가 들어선 후 오에서 최초로 왕을 칭한 오나라 최초의 왕인 [[수몽]]의 넷째로, 수몽은 가장 뛰어나고 덕망이 높은 넷째 아들 계찰을 후계로 삼아 왕으로 삼고 싶어했는데 자신이 넷째란 이유를 들어 극구 사양하여 그의 맏형인 제번이 왕이 되었다. 헌데 제번도 비범한 인물이라 계찰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넷째에게 물려 주려고 동생 여제에게 물려줬는데 이는 여제가 왕위를 잇고 물려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데 여제도 왕위에 연연하지 않고 셋째 여매에게 물려주며 여매도 계찰에게 물려주려고 하니 이는 형제들이 모두 왕위를 막내 계찰에게 물려주기 위함으로 이는 이들 형제간이 매우 우애가 두터웠으며 형제 모두 왕위에 연연하지 않는 덕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끝내 계찰이 자신은 백성들과 함께 하고 싶다며 사양하자 형제들이 계찰에에게 조카들 중에 후계를 정하게 하여 세 형의 아들 중 계찰 자신이 보기에 야심이 높은 공자 광[* 맏형 제번의 아들로 후의 합려로 계찰은 광이 야심이 깊어 백성들을 돌보지 않고 전쟁으로 내몰아 피를 부를 인물로 계찰이 평함.]과 둘째 형은 딸만 있어 제외하고 셋째 형 여매의 이들인 요가 덕망이 높다고 하며 요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민초들을 가여워하여 왕위를 사양하고 천하를 주유하며 백성들에게 의술을 펼쳤으며 후에 공자 광이 주군인 요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을때도 분노하였고 자신이 왕위를 빼았을 명분이 있음에도 백성이 도탄이 빠진다는 이유만으로 하지않고 합려에게 백성들을 잘 돌보라는 당부를 남기고 전국을 떠돌며 나라를 가리지 않고 백성들에게 의술을 펼치며 여생을 마감했다.], [[오자서]]의 사당만을 남겼다. 문창좌승을 지내다가 예주자사로 옮겼는데, 이때 [[이정(당)#s-2.1|이정]]의 모반이 진압되어 모반에 연루되고, 처형당할 자들이 2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적인걸은 저들은 잘못 인도된 것 뿐이니 용서하기를 요청해 [[측천무후]]는 그들을 풍주로 유배시키는 선에 그쳤고, 영주의 부로들이 유배된 자들에게 "적사군께서 당신들을 살렸다."고 말했다. 장굉보가 예주에서 뇌물을 요청했지만 이를 거절했다가 미움을 사서 복주자사로 좌천되었고, [[691년]]에는 낙주사마로 있다가 지관시랑에 임명되었으며, [[692년]]에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내준신으로부터 모반을 꾸몄다고 무고를 당해 팽택현령으로 강등되었다. [[696년]]에 위주자사가 되었다. 당시 전임 자사는 거란족에게 맞서 백성들의 입성을 위해 수성기구를 정비했으나 적인걸은 부임 후 백성을 밭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게 하였다. 손만영은 그것을 듣고 싸우지 않고 물러났다. 나중에 위주 백성들이 비를 세워 이를 칭송하였다. 이듬해에 거란 세력들이 진압되자 [[무의종]], 누사덕과 함께 하북으로 가서 백성들을 위로했으며[* 무의종은 손만영의 위협에 못이겨 어쩔 수 없이 따른 백성들을 전부 반역한 것으로 간주하여 죽였다.], 거란족의 [[이해고]]와 낙무정이 당에 항복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죽이라고 할 때 적인걸은 그의 재능이 뛰어난 것을 이야기하면서 죽이지 말고 당나라의 신하를 삼을 것을 권했으며[* 이해고는 옥검위대장군으로 임명되었고, 이해고가 걸사비우를 참살하였으나 천문령에서 대조영에게 대패하였지만, 그가 죽은 해인 700년 이해고와 낙무정이 거란족의 영주 반란 잔당들을 소탕하고 개선하자, 측천무후는 이를 적인걸의 공이라고 하였다.] 유주도독을 지내다가 겨울 10월에 난태시랑이 되었다. 이후 난태시랑(蘭台侍郞)과 동봉각 난태평장사(同鳳閣蘭台平章事)를 거쳐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에 이르렀는데, 당시 조정에서는 백성들을 징발해 안서사진을 지키게 해 원성이 많았다. 이에 적인걸은 [[안동도호부]]를 폐지하고 고씨를 고구려의 군주로 복립하여 강남의 양초수송을 중지하고 하북의 백성들을 위로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의 건의는 비록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얼마 후 납언직을 대행해 우숙정대 어사대부를 겸했다. [[698년]]에 [[측천무후]]에게 간언해 [[무승사]], 무삼사를 후사로 세울 뜻을 꺾고 폐위됐던 [[당중종]]을 황태자로 삼게 했다.[* 덕분에 [[측천무후]]의 주나라가 1대로 끝나고 당이 복원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때 측천무후를 설득한 내용이 지금까지 나라의 종묘에는 황실의 일원만 위패가 모셔지는데 황제, 황후, 황자 등으로 측천무후가 주나라의 황제로 조카인 무승사에게 물려주면 무승사는 자기 부모의 위패를 모실거라면서 역대 종묘에는 황제의 고모의 위패를 모신적이 없다며 측천무후가 당나라의 황후이기도 했으므로 당나라에 권력을 돌려주면 미담이 되며 위패도 황후로서 모셔진다고 설득하니 측천무후가 이에 따랐으며 적인걸의 설득에 자신이 황제가 될 수 없음을 알게된 무승사는 홧병으로 급사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무승사는 측천무후보다 일찍 죽었으며 그 시기가 측천무후가 당중종을 황태자로 삼게한 때로 스트레스성 뇌출혈로 보면 될듯.][* 이는 696년 [[이진충]]이 영주에서 일으킨 반란도 한 몫 했다. [[손만영]]이 기주를 함락시키고 그 자사 육보적을 도륙했을 때, '''무엇 때문에 우리 [[중종(당)|여릉왕]]을 폐했는가?'''라면서 이씨 황실을 복구하고자 하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이후 [[묵철가한]]이 당의 변경을 침공했을 때 자기 딸과 혼인하러 돌궐에 온 [[무연수]]를 억류했는데, 이는 자기 사위가 이씨 황족이 아니었기 때문.][* 그리고 [[무삼사]]가 거란 군대를 막아낼 군사를 징집할 때 사람이 모이지 않았는데, 이현이 군사들을 모집하니 수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고 한다.] 698년 [[6월 13일]]에 겹납언이 되었고 [[9월 21일]]에 하북도행군부원수가 되어 병사 10만을 거느리고 [[묵철가한]]을 추격했지만 따라잡지 못했다. 그 이후 하북도 무마대사로 임명되어 하북을 무마시켰는데, 당시 하북 백성들은 돌궐에 겁박당했고, 돌궐이 퇴각하자 이에 연루될까 두려워 피신했다. 이에 적인걸이 무측천으로 하여금 하북 여러 주의 백성들을 사면하고 귀향시켜 생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700년]] 여름 [[4월 29일]]에 측천무후가 더위를 피해 삼양궁으로 행차했는데, 이때 이국의 승려가 사리를 매장하는 것을 보여주겠다고 하자 적인걸이 부처는 이적의 신으로 저들은 가까운 사람을 미혹한다고 간언했다. [[측천무후]]가 커다란 [[불상]]을 만드려고 하자 간언해서 이를 중지시켰다.[* 여기서 측천무후가 만들려고 한 불상은 영화 적인걸 시리즈인《적인걸 : 측천무후의 비밀》의 거대 불상의 모티브가 되었다.] 적인걸은 내사로 있으면서 측천무후가 그를 국로라 불러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으며, 적인걸은 측천무후와 대면할 때마다 조정의 일을 끄집어내어 다투기를 좋아했지만 [[측천무후]]는 매번 뜻을 굽혀 그를 따랐다. 적인걸은 늙고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에 걸쳐 사직하기를 청했지만 측천무후가 허락하지 않았고, 같은 해 [[7월 26일]]에 사망했다. 적인걸이 죽자 측천무후가 조당이 텅 비었다고 탄식했으며, 조정에서 큰일이 있거나 많은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일이 있으면 하늘이 나의 국로를 빼앗아간 것이 너무 이르다고 할 정도였다. 적인걸은 일찍이 [[장간지]][* 장간지는 705년 [[원서기]], [[이다조]] 등과 함께 [[신룡정변|무측천을 퇴위시키는 정변]]을 일으킨다.], 요숭[* 본명은 원숭(元崇)으로, [[현종(당)|현종]](玄宗)의 두 번째 [[연호]]인 [[개원#s-4]](開元)을 피해 요숭(姚崇)으로 [[피휘|바꾸었다]]. 요숭은 [[송경]](宋璟)과 함께 현종을 보좌하여 [[개원지치|개원성세]]를 이룩한 [[명재상]]이다. 요숭과 숭경 이 두 사람의 성을 따서 요송(姚宋)으로 불렀다.], [[환언범]], [[경휘]], 두회정 등 수십 명을 천거했고, 이들은 모두 당(唐)을 중흥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국사]]에도 간접적인 영향이 있는데 698년 [[안동도호부]] 도독을 지냈다. 그러나 그 해 적인걸의 동선으로 볼 때 실제 도호부에 부임하지는 않은 듯하고, 유주도독을 지내면서 잠시 겸임한 듯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