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포하이 (문단 편집) === 다시 국민정부에 합류 === >"일본은 원칙상 통제권을 반환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무한으로 제한을 가하고 있으므로 반환하지 않은 것과 같다. 일본인이 하는 것은 늘 이와 같다." >---- >1940년 5월 5일 저우포하이의 일기 저우포하이는 일본이 중국의 주권, 정치적 독립, 영토를 존중할 것으로 기대했으나 왕징웨이의 영향력이 일본의 기대와 달리 형편없다는 것을 알자 일본은 매우 실망하여 왕징웨이를 푸대접했다. 3월에 성립된 왕징웨이 정권에 대하여 일본 제국은 장제스를 포섭하려는 최후의 공작인 [[동 공작]]이 실패한 후인 10월에야 승인하였으며 점령지에 대한 경제봉쇄, 물류지배를 지속했다. 저우포하이는 중앙은행을 설립하여 일본의 군정적 경제지배를 바꾸어보려고 했다. 일본은 이에 불만을 품었지만 저우포하이는 만약 중앙은행이 설립되지 않으면 자신이 사직하겠다고 강경히 나오면서 1940년 4월 16일 중앙은행 주비위원회 위원주석에 취임하여 5월 3일 중앙저비은행을 만들고 통화 일원화 정책을 펼쳤다. 이에 일본도 1940년 11월 30인 이를 승인했다. 하지만 일본은 일본인 고문들을 대거 배치하여 중앙저비은행을 장악해버렸고 저우포하이는 격노하여 "그러한 괴뢰은행이라면 만들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소리를 지를 정도였다. 이후 중일전쟁 내내 저우포하이는 통화안정 정책을 추구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성과가 없었으며 중국을 위기에서 구하기는커녕 매국노로 남을 상황에 처하자 점과 미신을 신봉하면서 매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이며 왕징웨이 정권에 참여한 것을 후회했다. >환도 반 년간 아무것도 한 것이 없다. 환도의 본래 의미는 중일합작의 모범을 만들어, 충칭이 이를 보고 항전이 필요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었지만, 현재의 상태를 보면 나조차도 난징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다. 국민정부를 자유로이 발전시켜 이를 원조해야 한다. >---- >1940년 10월 2일, 저우포하이 일기. >한커우, 충칭에 있던 때 나의 일본에 대한 관찰은 매우 잘못되었다. 일본에 대항한 항전파가 옳았다. >---- >1940년 12월 20일, [[도조 히데키]] 일본 육군대신과 만난 소감. >일본은 중국을 제2의 [[만주국]]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 >1941년 3월 15일, 저우포하이 일기. >일본 측이 하는 것은 전혀 우리의 기대와 다르다. 금후 화평운동의 전도, 중일관계는 실로 비관적이다. >---- >1941년 9월 11일, 저우포하이 일기. 설강가상으로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여 일본이 미국에게 덤비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저우포하이는 어쨌거나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것이라는 생각을 고쳐 1942년, [[다이리]]와 접촉하여 충칭에 자수의 뜻을 극비리에 전하였다. 1944년 왕징웨이마저 사망하고 나서는 천궁보가 [[행정원장]] 대리를 맡아 난징 정부 내부의 분열도 가속화되었고 저우포하이는 난징 정부에 대한 희망을 버리게 되었다. 저우포하이는 일본의 귀주성 침공 계획을 충칭에 누설하고 충칭과의 통합을 위해 장제스의 고향인 절강성의 개발에 나서는 등 일본을 버릴 준비를 하였다. 1944년에는 [[탕성즈]]의 동생 탕성밍을 비롯한 충칭 인사들과 접촉하여 대외중립, 대내통일을 구호로 삼자고 정하고 미군과 일본군을 모두 중국에서 철수시키겠다고 전했다. 일본 패망 직전인 7월 1일에는 어머니의 장례를 이유로 한달간의 휴가를 받아 상하이에 칩거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1945년 8월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상하이 행동총대 총지휘로 임명되어 상하이 치안 유지를 유지하여 공산당에 의한 접수를 방지하고 폭도들의 약탈을 방지하며, 괴뢰정권에 속한 인원, 서류, 물자를 국민정부에 양도하고 국민당 지하조직에 활동경비를 제공하라는 지시를 받아 수행했다. 8월 17일, 휘하의 세경대를 동원하여 난징시장 주학창, 전 상해시장 대리 오홍상, 선전부장 조존옥, 사법행정부장 오송고 등을 긴급체포하였으며 저항하는 육군부장 소숙선을 사살했다. [[천궁보]] 역시 체포하려 했지만 천궁보를 지지하는 사관학교 생도들이 장제스는 몰라도 저우포하이 따위의 명령은 듣지 않는다고 저항하여 실패했다. 이후 일본군이 개입하여 체포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자 마지못해 풀어주었고 이를 두고 자신이 국민정부에 충성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1945년 8월 20일, 저우포하이는 다음과 같은 담화를 발표했다. * 1. 본 사령부 관할구역 내 각 부대는 장제스 위원장의 허가 없이 이동하거나, 다른 부대의 개편을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 2. 치안유지에 관계된 집회 등의 행동은 본 사령부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안된다. * 3. 이미 정전에 따르고 있는 일본군과 일본인 거류민에 대해, 모욕과 상해를 주어서는 안된다. * 4. 인민의 납세의무는 계속 이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유를 불문하고 체납해서는 안된다. * 5. 공장설비 및 공공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임의로 매매해서는 안된다. * 6. 우군과 중앙파견의 부대는 우선 본 사령부로 연락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그는 일본의 패망으로부터 살아남는 듯 했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에 불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