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포하이 (문단 편집) === 강소성 교육청장 === 1931년 [[만주사변]] 발생 이후 선안내 후양외 정책과 [[국제연맹]]을 통한 외교적 해결 정책을 옹호하였다. 1931년 11월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최다 득표로 중앙위원에 당선되었고 경력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 초기에는 왕징웨이 계열의 개조파와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다. 1931년 12월 강소성 정부가 개편된 이후 1932년 1월 강소성 정부위원 겸 교육청장에 임명되었으며 10여년간 강소성의 교육을 관장하며 교육청 조직과 인원을 정비하고 임무를 구체화시켰다. 이때 의무교육 보급, 소학교원 검정, 교육림의 육성, 교육법규 심사 등과 관련된 특별위원회를 설치하여 교육발전을 추구했다. 또한 강소성 교육 3개년 계획을 발표, 교육재정의 확충과 교육행정 책임자들에 대한 자격시험을 실시하여 교사들의 자질을 관리했다. 저우포하이의 이러한 노력으로 13만 7천명의 아동이 입학, 강소성의 취학 아동은 71만명으로 증가했으나 여전히 400만에 가까운 미취학 아동이 있었으므로 저우포하이는 1933년까지는 4천개의 초급소학교를 건설하고 이에 필요한 교육비, 경상비를 마련하는 한편 매년 미취학 아동을 5%씩 감소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노력했다. 또한 향촌연합재정위원회를 조직해 여러 향촌이 힘을 합쳐 소학교를 유치하도록 하고 고급소학교에는 주변이 대부분 농촌임을 감안하여 농사과목과 농원실습을 추가하여 졸업생들이 생활에 필요한 기술을 익히게 했고 중심소확구제를 통해 교육의 질을 강화했다. 그리고 사범중학을 독립시키고 성립 사범전문학교 학과를 증설하여 의무교육 보급을 위한 교사들의 확충에 힘썼다. 교육청장 재직 시절 학생들의 항일 시위를 탄압, [[일본 제국]]과의 전면전은 중국을 망하게 하는 일이라 여겨 항일운동을 반대했고 1936년 [[시안 사건]]으로 [[장제스]]가 2차 [[국공합작]]을 선포하자 이를 용공정책이라 비판하며 일본을 자극할 것이라 여겼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