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저우커우시 (문단 편집) == 역사 == [[파일:저우커우 중국.webp|width=700]] 1693년에 세워진 저우커우 관제묘 시가지 동북쪽의 화이양구, 즉 진현은 [[춘추전국시대]] [[진(규성)|진나라]] (陳)의 수도였다. 진은 남쪽 [[초(춘추전국시대)|초나라]]의 속국이었는데, 그에게 2차례 멸망당했다가 복구될 정도로 허약하였다. 그리고 [[진민공]]이 [[오(춘추시대)|오나라]]와 연합해 초를 공격하며 배신했다가 기원전 478년 [[초혜왕]]의 공격을 받아 죽고 완전히 병합되었다. 그후 기원전 278년 [[진(영성)|진나라]] (秦)의 침공으로 기존 수도 영 ([[징저우]])을 상실한 [[초양왕]]이 임시로 천도하여 영이라 불렀다. 다만 기원전 241년 초양왕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초고열왕]]이 더 동쪽인 [[수춘]] ([[화이난시]] [[서우현]])로 천도하였다. 기원전 224년 초나라 멸망전 당시 일대는 진나라에게 정복되어 진군 (회양군)에 속하였다. 진 멸망의 단초가 된 [[진승·오광의 난]] 시에 진현은 반군이 세운 [[장초]] 정권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한나라]] 때는 시가지 남쪽 외곽 상수이현에 여남군 여양현 (汝陽縣)이 설치되었다. 여남군은 북쪽의 진군과 함께 [[연주]] 자사부 휘하에 있었다. [[원술]]과 [[원소]]의 본적지가 바로 이곳이다. 북쪽 기주에 속한 위군 여양현 (黎陽縣)과 구분해야 한다. --이곳 역시 [[원담]]의 거점이었다-- 다만 점차 여남군은 서남쪽의 [[주마뎬]]으로 옮겨졌다. [[서진]]에 들어 [[상추시]] 일대를 중심으로 한 양군에 포함되었다가 다시 진군으로 돌아왔다. [[남북조]] 시기에는 남조와 북조의 경계에 해당하였고, [[송(육조)]]의 지배기에 예주 진군에 속하였다. [[당나라]] 시기에는 진주 (陳州)에 편성되었고, [[송나라]] 때에는 경서북로 회녕부가 설치되었다. 회녕부의 치소는 진현이었고, 완구현으로 개칭되었다. 한편 [[명나라]] 들어 해금 정책으로 대외 무역이 막히고 대신 내륙 수운이 활성화되며 운하화된 지아루허와 잉허, 샤잉허 등이 만나는 합수구인 저우커우가 하항으로써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저우커우는 한때 '작은 [[우한]]'으로 불리며 번영하였고, 시가지는 세 구역으로 나뉘어 성벽이 둘러졌다. 하지만 근대 들어 해금이 풀리고 철도가 놓이며 수로 관리비가 큰 내륙 무역은 쇠퇴하였다. 특히 정저우-우한 철도가 서쪽의 뤄허를 지나게 되며 중요성에 있어 그에 밀리게 되었다. 내륙 수운과 함께 쇠퇴했던 도시는 철도가 놓이고, 고속도로가 건설되며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부활하였다. 70년대의 댐 건설로 전통적인 수운은 중단되었지만, 경공업 등 여러 산업이 발달하며 2000년 지급시로 승격되었다. 현재는 시가지끼리 비교해도 뤄허보다 더 큰 도시가 되었다. [[분류:허난성의 지급시]][[분류:중국의 도시]]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