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훈복벽 (문단 편집) === [[부원지쟁]]과 장쉰의 베이징 입성 === 1916년 [[위안스카이]]가 [[홍헌제제]]를 무리하게 시도했다가 [[호국전쟁]]으로 궁지에 몰려 사망한 이후, 중화민국은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 [[펑궈장]]의 [[직예군벌]]이 갈라져 싸우고 있었다. 1916년부터 부원지쟁이라 불리는 [[돤치루이]]-[[리위안훙]]의 정쟁이 심각하였고 1917년 시점에는 세계대전 참전 문제로 시끄러웠다. 협상국 측이 중국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요청하자 [[안휘군벌]]의 수장 [[돤치루이]]는 열렬히 호응하며 대독절교안, 대독선전안을 내놓았고 대독절교안 통과 이후에는 깡패들을 풀어 국회의원들을 폭행하기까지 하면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주장했다. 돤치루이가 이렇게 전쟁 참여에 집착한 이유는 이를 이용하여 리위안훙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돤치루이의 심복인 국무원비서장 [[쉬수정]]은 대놓고 리위안훙만 없앨 수 있다면 어떠한 수단이건 다 좋다고 했는데 그 수단에 복벽과 1차 대전 참전도 있었다. 하지만 돤치루이의 막 나가는 행보 때문에 5월 22일 돤치루이는 해직당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부원지쟁]] 문서 참조. 원래 장쉰은 리위안훙을 이용하여 돤치루이를 하야시키고 다시 독군들을 이용하여 리위안훙까지 하야시킴으로 최종적인 청제복벽을 이뤄낸다는 계획을 구상하고 있었다. 장쉰이 돤치루이와 연합하여 2차 서주회의를 개최, 13성구 연합회 맹주로 추대된 것도 복벽을 위한 군사연맹을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장쉰은 자신이 돤치루이는 지지하는 척 하면서 5월 21일 5차 서주 회의를 개최하였는데 5월 22일 대총통 리위안훙이 돤치루이를 면직시키자 격노한 돤치루이는 톈진으로 물러나 교통계, 연구계를 규합하여 임시정부와 임시의회 설립을 준비하는 한편 안휘, 봉천, 산동, 하남, 직예 등 자신의 세력들에게 중앙과 관계를 단절한다는 통고를 내리게 하고 베이징을 향해 진격할 준비를 하라고 지시했다. 장쉰 역시 이에 호응하는 척 총통 제거안을 회의에 상정하고 안휘의 [[니쓰충]], 직예의 [[차오쿤]], 하남의 [[자오티]], 산서의 [[옌시산]], 산동의 [[장회지]], 섬서의 [[진수모]], 절강의 [[양선덕]], 복건의 [[리허우지]], 봉천의 [[장쭤린]] 등의 독립을 선포하게 했다. 여기에 쉬스창이 호응하여 장쉰에게 각 성과 연합할 것을 청하고 자신을 육해군 대원수로 추대하려고 하자 장쉰은 이를 자신의 공을 채가는 것으로 여겨 5월 30일, 돤치루이에게 전보를 보내 쉬스창의 육해군 대원수 추대에 반대하였다. 이에 쉬스창은 자기 집에 칩거하였다. 돤치루이가 막나가자 이걸 막을 군사적인 힘이 없었던 리위안훙은 겁에 질려 장쉰에게 도움을 요청, 5월 31일 베이징으로 오라는 전문을 보내고 6월 1일 다시 전문을 보내 시국을 조정해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6월 6일 톈진의 독립각성총참모단에서 뇌진춘과 장진방이 장쉰을 대신하여 복벽을 주장하자 참가한 군인들이 일제히 반대를 표명하였고 회의는 험악하게 해산되었다. 장쉰은 복벽을 자기 혼자 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6월 7일 기차를 타고 서주에서 북상하기 시작하여 6월 8일 자신의 휘하 변자군 5천명을 거느리고 톈진에 도착, 총통 비서장 하수강의 환영을 받았다. 장쉰은 변자군은 베이징 외곽에 주둔시켰으나 자신은 텐진에 남아 돤치루이, 쉬스창 등에게 복벽에 관한 의사를 타진하였다. 그리고 자신이 사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기대하던 리위안훙에게 시국 조정 6개 방안이라는 것을 내밀며 책임내각 실시, 3일 안의 국회의 해산, 성의회 해산, 헌법 재정, 총통부 관리 징계, 정치범 특사를 통해 각성의 독립 취소를 꾀하자고 요구했다. 여기에 저항할 방도가 없던 리위안훙은 6월 12일[* 혹은 6월 13일.] 국회 해산령을 내렸다. 국무총리 [[리징시]]를 대리하고 있던 외교총장 오정방이 서명을 거부하자 그를 경질시키고 보병통령 겸 경진임시경비부사령관 강조종을 새로운 국무총리 대리로 삼아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톈진에서 장쉰은 쉬스창을 만났다. 쉬스창은 3가지 조건을 내밀었다. ||1. 쉬스창이 섭정이 되어 전권을 장악한다. 2. 쉬스창의 딸을 선통제와 결혼시킨다. 3. [[입헌군주제|군주 입헌]]을 실시한다.|| 무리한 요구에 장쉰은 당연히 거부하고 6월 14일 [[리징시]], 장진방, 뇌진춘, [[돤즈구이]]를 거느리고 베이징에 입성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