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훈복벽 (문단 편집) == 뒷이야기 == 이후 [[쉬스창]]은 대리총통 [[펑궈장]]의 임기가 끝나면서 직계와 환계의 동시 추대를 받아 1918년 대총통에 당선, 1918년 10월 10일 취임했다. 대총통 당선 직후인 1918년 10월 23일, 쉬스창은 차오쿤과 장쭤린의 청을 받아들여 장쉰의 체포령을 취소하고 그를 사면했다. 1921년 1월 26일 장쉰은 장쭤린의 보증으로 장강 순열사로 추천받았으나 장쉰은 부임하지 않았다. 장쉰은 1923년 9월 12일 톈진에서 사망했는데 푸이는 그에게 충무(!)의 시호를 내리고 칙사를 보내 조문하였다. 복벽 사건은 분명한 민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었지만 이에 대한 관계자들 대부분이 그다지 처벌받지 않았다. 참여한 인물들 중 상당수가 청나라의 유신이라 건드리기 그랬던 것도 있었고 당시 중국이 군웅할거의 난세라서 어차피 쉬엄쉬엄 넘어가는 문제도 있었지만 수천 년을 내려온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란 것이 그냥 사라지진 않아서, 당시 군벌들은 민국의 총통과 청나라의 섭정왕 자리를 모두 꿈꾸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쉬스창은 1918년 총통 당선 후에 자신을 어린 황제의 섭정이라고 하기까지 했다. 물론 [[구웨이쥔]]을 비롯한 신흥 관료 조직과 국민당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구시대적인 군벌들은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사라졌다. 이 복벽사건의 영향으로 광저우 정부와 베이징 정부 모두 푸이를 평민으로 전락시키자는 합의가 나와 전국에 알려지기도 했으나 끝내 실행되진 않았다. 돤치루이도 리위안훙도 펑궈장도 황제는 자주적 행위자가 아니니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결론을 발표하고 황실에 해를 끼치진 않았다. 남방 급진파들은 선통제가 반역자라면서 황실 우대 조건을 폐기하고 선통제를 처형하라고 줄기차게 요구했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1924년 [[2차 직봉전쟁]] 중, 군벌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킨 후 [[핍궁사건]]을 일으켜 청 황실을 자금성에서 퇴출시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