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헌명숙황후 (문단 편집) == 사후 == 명도 2년(1033) 3월 29일 예순다섯의 나이로 유아는 세상을 떠났고 '장헌명숙(章獻明肅)'이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원래 이때까지만 해도 황후의 시호는 2자였지만 유아부터 4글자로 늘어났다. 이후로도 수렴청정을 한 태후는 네 글자 시호를 받았다.] 유아는 양태비를 황태후로 봉해 국가 대사를 함께 논의하라고 유지를 남겼지만, 대신들이 당연히 반대하여 실현되지 않았다. 유아가 죽은 후 당씨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태종의 아들이자 인종의 숙부인 [[조원엄]](趙元儼)이 찾아왔다. 그는 인종에게 생모가 유아가 아닌 진종의 후궁 이씨였고, 이씨가 유아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인종은 큰 충격을 받아 이씨의 관을 파내 조사하게 했는데, 관 속에는 황후의 옷을 입은 이씨의 시신이 수은으로 온전히 보전되었다. 유아가 후궁 이씨를 살해하지 않았음을 확인한 뒤 인종은 유아를 의심했음을 후회하며 그해 10월에 영정릉에 안장하고 유아의 일족을 후히 대접했다. 그후 유아가 축출했던 자들이 유아의 악행을 고발해 논쟁이 불거졌다. 그러나 [[범중엄]]이 태후가 황제를 10년이 넘도록 보좌하며 몇 가지 과오를 저질렀지만 공을 덮을 정도라고는 아니라고 말했고, 인종은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유아에 대한 비판을 더이상 하지 못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