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한 (문단 편집) == 생애 == [[조고]]는 [[이세황제|황제 호해]]에게 아첨하여 정사를 멀리하고 놀기만 하도록 만들었으며, [[진승·오광의 난]]을 시작으로 옛 [[전국시대]] 6국의 후예들의 반란이 연달아 일어나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황제에게 알리지 못하도록 했고 제대로 대응도 하지 않았다. 장한은 본래 무관 출신은 아니었고, 소부(少府)라는 재정 부서의 관리였다.[* 좀 더 정확히는 황실의 재산을 담당하는 자리로서 삼공의 바로 아래인 9경에 속하는 자리였다. 즉 장한은 진나라에서 고위직에 있었던 것.] 허나 [[고대]]에는 문관이 무관직을 겸했기 때문에 평상시에는 행정업무를 보더라도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군을 이끌고 나갈 수가 있었다. 하지만 [[초나라#s-2.2|장초]]의 대군이 [[함곡관]]에 들이닥쳐 진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이자, [[간신]] [[조고]]라도 자신의 목이 달아나는 것은 두려웠기 때문에 장한을 불러들여 반란군을 토벌하게 했다. 진나라가 망조가 들어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장한은 여산에서 부역을 하고 있던 죄수들[* 이 여산에서 부역을 하던 죄수들은 세금을 못냈다거나, 노역에 늦었거나, 아니면 기타 잡다한 이유로 각지에서 끌어모은 죄수들로 그나마도 절도범 이상의 중범죄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초나라 패현 사수의 정장이었던 [[고제(전한)|유방]]도 자기 동네의 죄수들을 여산으로 호송하던 도중 튀어서 세력을 만들었다. 즉 장한의 초기 병력은 멸망한 구 6국 백성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중간에 전역을 시켜줄 상황이 아니니 [[항우]]가 후일 [[신안대학살]]을 벌일 때 진나라 출신뿐만 아니라 6국 출신들도 대거 끔살당했을 가능성이 높다.]을 사면하고 무장시켜 군대를 꾸렸다. 비록 죄수들의 군대였지만 명장 장한의 통솔력이 뛰어났고, 애초에 오합지졸이었던 [[진승]], [[오광(초한쟁패기)|오광]]의 장초군은 연이은 승리로 군기가 해이해져 있었고 6국의 후예들이 나라를 다시 세우면서 인재와 병력도 빠져나갔기 때문에 쉽게 격파당하여 무너져버렸다. 이후 진군의 전열을 가다듬어 재기의 기반을 마련하고, 장한은 대대적인 반군 토벌에 나서게 되었다. [[항우]]에게 패배하는 기원전 207년, [[거록대전]] 이전까지 장한의 전공은 걸출한 것이었다. 호해의 칙서를 위조하는 대담한 수법으로 조나라의 [[무신(초한쟁패기)|무신]]을 와해시켰으며, 제나라의 [[전담#s-2]]을 죽였고, 위나라의 위구를 격파하는 등 반군을 격퇴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전영]]의 군대를 섬멸하기 위해 제나라를 공격하던 도중, 구원군으로 온 항량과 동아에서 격돌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대패를 당했다. 항량은 추격군을 꾸렸는데 그 지휘관이 [[고제(전한)|유방]]&[[항우]]라는 개사기 조합이었기에 다시 전투를 치렀지만 또 지고 말았다. 하지만 장한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진지를 구축하는데 성공했고, 패배에 놀란 진 조정으로부터 막대한 추가 병력을 지원받았다. 한편 [[항량]]은 이같은 승리를 과신하며 자기가 잘나서 이긴 줄 알고 천하에 자신의 적수는 없다는 오만함에 빠졌고, 항우와 유방이라는 최고 전력을 다른 곳으로 내돌려 전력을 분산시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다. 동아 전투 후 겨우 2달 후에 장한은 정도에 주둔하고 있었던 항량에게 기습을 가했고, 항량은 허무하게 사망하고 만다. 이후 조나라 공략에 나서 거록을 포위했는데, 이때 송의를 죽여 초나라의 군권을 장악한 [[항우]]의 맹공에 대패하게 된다. 장한은 극원에 주둔했고, 항우는 장하 남쪽에 주둔한 채 양측 모두 싸우지 않고 몇달 정도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장한이 뒤쪽으로 슬금슬금 퇴각하자 전황을 모르던 호해는 장한을 꾸짖었는데, 호해가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겠거니 하고 여겼던 장한은 사마흔을 보내서 제대로 설명하려 했다. 그런데 왠지 조고가 바로 나타나서 알현시켜주지 않고 사흘간 시간을 끌자 사마흔은 누군가를 금품으로 포섭하여 내부 파악을 한 결과[* 판본에 따라서는 장한 일행이 토사구팽 당하기 직전인걸 보다못한 깨어있는 누군가가 진실을 알려주자 그대로 도망치는 것으로 나온다.] 너무나도 커져버린 장한을 숙청하고 군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장한과 자신들을 모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사마흔은 즉시 부리나케 도망쳤다. 조고도 허겁지겁 사마흔을 추격했으나 잡을 수가 없었다. 돌아온 사마흔은 조고가 조정을 농단하고 있어서 호해를 차마 만날 수조차 없었다며, 공을 세워봤자 시기당할 것이며 패배한다면 책임을 지고 죽게 될 것이라는 말로 항복하길 권했다. 진나라에 회의를 느낀 장한은 진군 20만명을 이끌고 [[항우]]에게 투항하자 다행히도 장한의 항복은 받아주었다. 하지만 뒤끝이 끝내주던 항우는 장한과 장수'''만''' 살려두고 '''[[신안대학살|반란을 방지하는 빌미로 항복한 진나라 군대 20만명을 신안에서 생매장해버렸다]]'''. 항우가 진나라를 멸망시킨 뒤 [[범증]]의 진언에 따라 장한은 같이 항복한 진나라 장수인 [[사마흔]]과 [[동예(초한쟁패기)|동예]]와 함께 [[삼진(초한시대)|옛 진나라의 영토를 셋으로 쪼개 만들어진 삼진왕(三秦王)]]의 하나인 옹왕(雍王)으로 봉해졌다. 같은 진나라 사람이 다스리면 불만이 적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진나라 사람들은 장한을 [[학살자]]인 [[항우]]에게 붙은 [[앞잡이]] 정도로 여겨서 그는 원망을 받고 인심을 얻지 못했다. 물론 장한/사마흔/동예 3인방도 따지고 보면 항우에게 속은 피해자인 만큼 앞잡이 따위에 비교될 만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항우가 삼진왕을 뺀 진나라 병사들 수십만 명을 생매장해 몰살시켰으니 적어도 당시 진나라인들이 생각하기엔 장한 등 3인은 '''[[프로파간다|자신들만 살자고 20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팔아먹은]]''' [[매국노]]였다. 세 사람에겐 정말 억울하겠지만 그게 현실이었다. 한신은 유방에게 진나라 사람들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까지 차 있으며,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는다고 단언을 했을 정도다. 거기에 자신을 따르던 부하들은 모두 신안에 묻혀있어서 군사를 재정비할 여력도 없었고, 진나라 땅까지 항우가 불태우고 때려부쉈기에 생산력과 경제력마저 처참했다. 민심, 군사, 경제 세 가지 모두 엉망이 된 상태에서, 분봉된 지 단 세 달 뒤에 유방의 한군이 진창로로 나와 삼진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장한은 몇 차례 맞서 싸웠지만 하필 상대가 '''다른 이도 아닌 [[한신]]이었고''' 번번이 참패하고 폐구에서 농성하는 처지가 되었으며, 유방 측은 당시엔 장한이 급하지 않았기에 포위만 해놓고 지나갔다. 이렇게 쓰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장한은 무려 팽성대전 이후 안읍 전투가 벌어지는 9개월 후까지 저항하고 있었으며, 전황의 변화로 후방의 우환을 끊어야 했던 한군이 폐구를 수몰시켜서[* 번쾌가 생각해낸 것이었다고 한다.] 형세가 위태로워지자 '''[[자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자칫하면 항우와 협공할 가능성도 있었으니 한군 쪽도 급했을 듯. 사실 장한이 저항하는 동안 사마흔, 동예는 유방에게 항복해서 목숨을 건졌다는 사실[* 물론 [[팽성대전]]에서 유방이 참패한 뒤 다시 [[항우]] 밑으로 돌아가서 싸우다 형양에서 패하고 자살하지만 유방 역시 당장 삼진 평정 시점에서 굳이 죽이겠다고 시간을 지체했다간 관중을 완전히 세력권에 두기 전에 항우군과 싸워야 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어 당시에는 그들을 죽일 수 없었다.]을 보면 장한도 이때 항복했다면 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부하장수에 불과했던 동예, 사마흔과는 달리 장한은 신안대학살의 공범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므로 항복했어도 그를 죽이지 않았다면 유방은 관중의 지지기반을 잃게 되었을 테니 죽여야만 하긴 했을 것이라는 사람도 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유방에게 합류해서 눈에 띄는 공적을 세웠다면 은퇴시키는 정도로 끝낼 수도 있는 일이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