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평대전 (문단 편집) === 결말 ===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가[* 범수는 백기의 은자인 진나라의 재상 양후 [[위염(전국시대)|위염]]을 끌어내리고 자기가 재상이 되었다.]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 되어 장차 있게 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 합종책으로 유명한 [[소진(전국시대)|소진]]의 동생으로, 위키에 항목은 없으나 형 못지 않게 활약한 인물이다. [[어부지리]]의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문제는 사기에 기록된 소진의 활동시기는 기원전 330년인데, 장평대전은 260년이다! 다만 최근 발견된 죽간본에 따르면 소진의 활동시기는 사기보다 꽤 늦었다고 한다.]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도록 [[소양왕]]을 설득해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韓、趙恐,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를 설득하게 했다. >「武安君禽馬服子乎?」 >「무안군이 [[조괄|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又曰: >또 소대가 말했다. >「即圍邯鄲乎?」 >「곧바로 한단(邯鄲) 땅을 포위할 것입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趙亡則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武安君所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定鄢、郢、漢中,北禽趙括之軍,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今趙亡,秦王王,則武安君必為三公,君能為之下乎?雖無欲為之下,固不得已矣。秦嘗攻韓,圍邢丘,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韓、魏,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故不如因而割之,無以為武安君功也。」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남쪽으로 언 땅ㆍ영 땅ㆍ한중 땅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의 공적도 이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 여기서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라는 말은 단순히 관직을 뜻하는 것이 아닌, 백기가 삼공이라 불리는 [[문공(주)]], [[소공석]], [[태공망]]과 같은 급의 공을 세운다는 중의적 의미라 한다. 전국시대의 [[펀치라인]]이라고 보면 될 듯.] >於是應侯言於秦王曰: >이에 응후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말했다. >「秦兵勞,請許韓、趙之割地以和,且休士卒。」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ㆍ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王聽之,割韓垣雍、趙六城以和。 >진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 땅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 >正月,皆罷兵。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武安君聞之,由是與應侯有隙。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몇 달 이후 진나라 군대는 장평대전의 피로로 병이 든 백기 대신 왕릉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한단을 공격했지만 한단 백성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오랫동안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신릉군]]이 위나라에서 지원군을 훔쳐오고, [[평원군]]은 [[모수]]의 재치로 초왕으로부터 [[춘신군]]이 이끄는 지원군을 받아 올 수 있었다(자세한 내용은 신릉군, 평원군, 모수 항목 참조). 평원군은 한단에 초나라의 지원군보다 먼저 도착해서 자신의 공을 자만했다. 한단 밖에서 참혹한 전쟁이 벌어지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사치를 벌이고 있자 한 문객이 조나라가 멸망하면 평원군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어째서 그러느냐고 간언했다. 이에 크게 깨달은 평원군은 자신의 처첩들로 하여금 전부 전쟁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고, 전재산을 풀어 3,000명의 군사를 조직해 진나라의 군대가 한단을 정복하는 시간을 늦추었다. 이때 진나라에선 왕릉이 한단 공략에 번번이 실패하자 초조해진 소양왕이 백기를 불러들였으나 백기는 병을 핑계로 이를 매번 거절했다. 위나라와 초나라의 군대가 조나라를 구원하자 진나라의 군대는 격파당했고, 범수는 자신이 가장 신용하는 측근이었던 정안평[* 범수가 위나라에서 치욕을 당해 반 시체로 목숨만 부지하던 시절, 범수를 돌보고 진나라로 탈출시켜준 인물로, 범수가 진의 상방이 된 이후 낙하산으로 장군의 자리에 오른다.]에게 30,000명의 병사를 보내 진나라 병사를 돕게 했지만, 그 측근은 조, 위, 초 3개국 연합군의 포위를 당해 30,000명의 병사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태행산맥을 넘어 하동까지 진군을 추격했고, 서로의 시체로 분수가 메워질 정도로 격렬하게 싸웠다. 중국 위키에선 진군의 8할이 사상했다고 기록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