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평대전 (문단 편집) === 포로 학살 === >「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 >출처: 《사기》 [[https://zwaza.fandom.com/ko/wiki/%EB%B0%B1%EA%B8%B0%EC%99%95%EC%A0%84%EC%97%B4%EC%A0%84|<백기왕전열전>]] 조괄이 죽자 지휘관을 잃은 조군은 항복했고, 진군은 45만에 달하는 전쟁 포로를 결국 전부 참수하고 갱살했다. 자비랍시고 15살이 안 된 애들은 살려줬는데, 《사기》에 따르면 고작 240명에 불과했다고 한다.[* 한 나이대를 모두 합쳐도 240명뿐이라 전체 병력도 그렇게 많지 않았던거 아니냐고 착각할 수도 있는데, 전근대에는 대부분 15~16세를 성인 기준으로 삼고 그때부터 징병했기 때문에 15세도 안 되었는데 징병된 사람은 원래 징병될 나이가 아닌데 잘못 징병된 행정오류의 산물이라 수가 매우 적은 것이다. 이들의 숫자를 기반으로 정상적으로 징병된 병력의 숫자를 추산하는건 불가능하다.] 포로를 노예로 파는 방안은 고대 중국에 노예 시장 같은 제도가 없어서 애초에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진나라가 다른 나라의 사람 수십만을 포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조나라로 돌려보내자니 포로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어서, 적을 고스란히 보내주는 꼴이 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결책이라면, 투르크 군벌인 이마드 앗딘 장기가 항복을 거부한 요새 하나를 점령한 뒤 수비군 궁수들의 엄지를 잘랐던 방식 등이 있다. 포로를 죽이지 않으면 진군이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이었다는 주장의 경우, 진나라의 군공수작제는 적의 수급을 갖고 가야 신분을 상승시켰으며, 포로를 풀어주는 것은 병사들의 신분 상승의 길을 막는 것과 다름없었고, 이는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백기왕전열전>에는 "먼저 포로의 목을 '베고' 매장했다." 라는 대목이 있다. 다만 이 설은 신뢰도가 낮다고 할 수 있는데, 훗날 장평대전 현장을 발굴하고 보니, 사기의 기록에 나오는 '목을 베고 매장한 시체'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