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평대전 (문단 편집) === 포로학살의 실제 규모에 대한 추측 === 논란이 많기 때문에, 중국쪽에서는 이런 저런 추측들이 많이 나오나, 일단 45만명의 포로가 있었다면 학살 자체는 가능하다는 의견이 대세다. 또한 발굴된 유골들의 상태를 보니 사기의 기록대로 수급을 취하기 위해 머리를 자르고 묻은 유골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만약 포로학살이 실제로 있었던 일이었다면 진군은 부수적인 목적 없이 그저 조군을 죽이는데만 집중했다는 뜻이다. * '''과장없이, 45만 포로가 학살당했다.''' : 의외로 이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도 꽤 많다. 가오핑 시에서 발굴되는 당시의 무기나 갑옷, 유골의 숫자가 꽤 많기 때문. 그러나 반론으로는 가오핑 시는 중국사에서 많은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이기에, 모든 유골이 장평대전의 사망자는 아니라는 반론 또한 있다. 또한 당시의 행정체계, 인구수로 과연 이런 대규모의 동원이 가능하냐는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다.[* 이 의견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 현종대부터 가오핑 시 근방에서 해골이 발견된 것이 그 증거라고 주장하나, 고대~중세에는 [[연대측정법]] 같은 것도 당연히 없었으며 고고학도 크게 발달하지 않았으니 당~청대까지는 다른 전쟁에서 죽은 자들의 유골을 장평대전의 유골이라고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 '''사기의 규모가 과장되어 있었으며, 실제 규모는 수만~10만이었다.''' : 제일 설득력을 얻는 의견. 앞서 설명하였듯이 사기의 병력 규모는 과장되어 있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이 의견에 대한 반론으로는 '''발견되는 유골과 유물이 너무 많다는 것.''' 가오핑 시에서 발견되는 유골의 숫자가 매우 많고, 유실된 유골까지 감안한다면 규모는 더 커진다. 다만 위에서도 서술하였듯이, 가오핑 시 근처는 중국사에서 수많은 전투가 치러졌던 지역이며, 정확한 검증과정을 거치지 않은 여러 유골들은 장평대전의 유골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 '''염파 부임시기부터 전투중 죽은 병력이 25만, 백기가 학살한 병력이 20만이었다.''' : 절충안. 다만 문제는 장평대전은 10년 넘게 이어진 전쟁이 아니라 1년 안에 끝난 전쟁이며, 이는 여전히 당시의 인구수에 비하면 현실성 없는 대규모의 병력이다. 장평대전이 3년동안 진행되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으나 사기의 기록도 3년동안 진행되었다는 기록이 되어있지 않으며, [[수호지진간]]의 내용에서도 장평대전은 1년동안 진행된 전쟁이라는 기록이 존재한다. [[https://www.zhihu.com/question/20363696/answer/148890127|중국 웹사이트의 토론 중, 수호지진간의 연표를 인용한 주장, 소양왕 47년에 장평대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진군은 전쟁이 끝나고 상당의 주민들까지 모두 학살했다.''' : 조나라 병사뿐만 아니라 전쟁이 벌어졌던 인근 지역을 진나라가 접수한 뒤, 상당의 주민들까지 모조리 학살하여 45만을 죽였다는 의견이다. 문제는 이것이 사실이라면 엄청난 악행이니 포로학살과 같이 당대의 사서에 충분히 기록될만한 내용인데, 이 의견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그 어떤 저서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