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평대전 (문단 편집) === 조군의 규모 === 사실 [[호왈백만]]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조군의 규모이다. 일단 장평대전은 보통 진군 40만, 조군 40만이 붙은 전쟁으로 알려져있는데,[* 중국 위키피디아에는 진군 65만, 조군은 40만에 당시 상당에 주둔하다가 조나라로 넘어간 한나라 군사 5만으로 총 45만이라 기록되어있긴 하나, 후술하는 내용을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규모라 볼 수 있다.][* 가끔 중국 웹사이트에서 진나라는 100만명을 동원했으며 조나라는 50~60만을 동원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현실성이 없어도 너무 없는 주장이니 믿을만한 것이 아니다.] 당시 상황이 기록된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을 보면 이러하다. >至九月,趙卒不得食四十六日,皆內陰相殺食。 >9월이 되어 조나라 병사가 식량을 받지 못한 게 46일이나 되자, 모든 병사가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來攻秦壘,欲出。 >이윽고 진나라의 보루를 공격해 포위망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為四隊,四五復之,不能出。 >군대를 네 부대로 나뉘고, 너댓번을 반복해 시도했으나 포위망을 벗어나지 못했다. >其將軍趙括出銳卒自搏戰,秦軍射殺趙括。 >그러자 장군 조괄이 정예병을 이끌고 선두에서 싸웠으나, 진나라 군대가 화살에 쏴서 조괄을 사살했다. >括軍敗,卒四十萬人降武安君。 >조괄의 군대가 패하자 병사 40만 명이 무안군에게 항복했다. >武安君計曰: >무안군은 생각했다. >「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乃挾詐而盡阬殺之,遺其小者二百四十人歸趙。 >이에 간사하게도 모든 병사를 구덩이에 파묻어 죽이고, 나이 어린 240명만을 남겨서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포로로 잡힌 45만 명을 모두 죽인 것이다. >趙人大震。 >조나라 사람들은 크게 경악했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즉 처형당한 조군은 45만 명이다. 그런데 이 기록을 보면 이상하다 여길 수밖에 없는 것이, 46일 동안 굶어 '서로 죽여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적힐 정도로 참혹한 상황에 처한 조군의 규모가 40만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조괄이 진군의 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투에 나섰다가 사망한 것을 감안하면, 이 당시 조군은 포위당한 상황에서 그냥 가만히 굶어가며 버틴 것이 아니라 포위망을 뚫기 위해 계속 전투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총대장이 죽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면 아무리 고대~중세시대의 전투에서 부상자, 사망자의 숫자가 적은 것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전투로 인한 사망자의 숫자만 해도 꽤 많았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런 내용을 다 감안한다면, 저 40만이라는 규모도 원래 조군의 규모에 비해서는 한참 줄어든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사례를 예로 들자면 추축군 33만 명이 포위망에 갇혔는데 이들은 소량이나마 보급을 계속 받은 상태에서 두 달을 버텨 9만 명만 살아남아 사로잡혔고 그나마도 포로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너무나 쇠약해진 독일군 병사들이 역병으로 죽어 나중에 독일로 돌아온 병사들은 6천 명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군은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가며 한달 반을 버텼는데 남은 포로만 40만이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일단 40만의 포로에 앞서 설명했듯이 백기와 진군이 전공을 뻥튀기하기 위해서 전투 중 죽은 사망자와 굶어 죽은 아사자까지 포함했다고 가정해도, 앞서 인용된 기록보다 조금 앞선 시점의 기록을 보면 중간에 포함된 5만 명의 포로가 있다. >趙括至,則出兵擊秦軍。 >조괄이 조나라 군대에 이르자 곧 출병하여 진나라 군대를 쳤다. >秦軍詳敗而走,張二奇兵以劫之。 >진나라 군대는 패하는 척하며 달아나면서 두 갈래의 병사들을 매복시켜 조나라 군대를 기습하기로 했다. >趙軍逐勝,追造秦壁. >조나라 군대는 승리를 좇아 진나라가 쌓은 보루까지 쫓았다. >壁堅拒不得入,而秦奇兵二萬五千人絕趙軍後,又一軍五千騎絕趙壁閒,趙軍分而為二,糧道絕。 >보루가 굳게 막으니 들어갈 수가 없었는데 진나라 복병 2만 5천 명이 조나라 군대의 후방을 끊고, 또 5천 명의 기병 한 부대가 조나라 군대와 보루 사이를 끊으니, 조나라 군대는 둘로 나뉘고 보급로도 끊어졌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이 기록을 본다면 저 5만의 포로가 붙잡힌 경위는 총 3가지 경우로 추측 할 수 있다. * 1.백기 부임 이전 왕흘이 진군을 지휘했을 때 포로로 잡은 조군 : 일단 백기는 부임하자마자 조군을 유인하기 위해 계속 퇴각하였으니, 진군이 적극적으로 전투하던 왕흘 시기에 잡은 포로도 적잖은 수였다고 볼 수 있긴 하다. 그런데 [[수급|군공수작제]] 때문에 잡힌 포로를 죄다 죽일 정도로 잔혹했던 진군을 생각한다면, 이 당시 잡힌 포로는 잡히자마자 죽었을 가능성이 크다. * 2.조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한 전투에서 붙잡힌 포로 * 3.포위망을 뚫기 위해 전투를 벌이다 포로로 잡힌 조군 1번은 서술한 이유로 빠르게 죽었다 가정하면, 저 5만의 포로는 결국 2번과 3번의 이유로 잡혔다고 볼 수 있다. 저 전투에서 포로만 5만 명이 잡혔을 정도라면, 못해도 조군의 규모는 45만에 추가로 수만의 군대가 있었다고 추측이 가능하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조군의 규모는 총 45만이었으며, 백기가 전공을 뻥튀기시키기 위해 중간에 죽은 사망자나 아사자도 포로에 넣었을 것이다.'라고 볼 수도 있긴 한데, 이러면 이제 이 기록들이 걸린다. >진소양왕 47년 (기원전 260년) >四十七年,秦使左庶長王龁攻韓,取上黨。 >47년, 진나라가 좌서장 왕흘(王龁)을 보내 한나라를 공격해 상당 땅을 빼앗게 했다. >上黨民走趙。 >상당 땅의 백성들이 조나라로 달아났다. >趙軍長平,以按據上黨民。 >조나라는 군대를 장평(長平) 땅에 보내 상당 땅의 백성들을 보호했다. >四月,龁因攻趙。 >4월, 왕흘이 조나라를 공격했다. >趙使廉頗將。 >조나라는 염파(廉頗)를 장수로 삼았다. >趙軍士卒犯秦斥兵,秦斥兵斬趙裨將茄。 >조나라 군대의 병사들이 진나라의 정찰병을 공격했으나, 진나라 정찰병이 조나라의 부장 가(茄)를 베었다. >六月,陷趙軍,取二鄣四尉。 >6월, 조나라 군대의 진채를 무너뜨리고 두 개의 보루를 빼앗고 도위 4명을 잡았다. >七月,趙軍筑壘壁而守之。 >7월,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쌓아 굳게 지켰다. >秦又攻其壘,取二尉,敗其陣,奪西壘壁。 >진나라가 또 그 보루를 공격해 도위 2명을 잡고 그 진을 무너뜨렸으며, 서쪽의 보루를 빼앗았다. >廉頗堅壁以待秦,秦數挑戰,趙兵不出。 >이에 염파는 보루를 튼튼하게 쌓아서 진나라에 대비하였으며, 진나라가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음에도 조나라 병사들은 보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 >사기 백기왕전열전 바로 개전 초기의 기록이다. 이 당시 조군은 진군을 장기전으로 끌고가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유인하는 데 성공했는데, 이때 조군의 피해도 매우 컸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부장과 도위 6명이 죽고 보루 3개를 빼앗길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못해도 이때 죽은 병사는 수만에 달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결국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사기의 기록만 가지고 따져본다면 장평대전에 투입된 조군의 총규모는 못해도 45만에 수만이 더 있었고, 희생자를 크게 잡으면 충분히 수십만이 더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뻥 좀 섞으면 '''백만대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이러한 수치는 과장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다만, 전국칠웅 중 진나라, 초나라를 제외하고 가장 큰 규모의 병력을 운용했던 것은 조나라가 맞다. 그리고 이 조나라가 전력을 기울인 싸움에서 대부분의 병사들이 사망했던 것도 거의 확실해보이는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