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파쿠이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파일:1938년장발규.jpg]]|| || 1938년의 장파쿠이 ||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군이 [[제2차 상하이 사변|상하이를 공격하자]] 8월 13일 심야, 8집단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일본군에 맞섰고 3전구 우익집단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8,10집단군을 이끌고 상하이 수비를 맡았다. 이후 9전구 2병단 총사령으로 항전에 임하다가 광저우 함락 이후 [[위한머우]]를 대신하여 광저우 수정주임 겸 4전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유명한 반장파였다는 점에서 장제스에 맞서 일본이 신정권을 수립한다면 사천의 판원화, 운남의 [[룽윈]]과 함께 이에 합류할 것으로 예상되었고 이 때문에 [[왕징웨이 공작]]에 넘어간 왕징웨이로부터 [[왕징웨이 정권]]에 합류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룽윈과 판원화 역시 거절했다. 사실 애초에 왕징웨이 정권에 붙은 군벌이 '''없었다'''. 장제스 하면 이를 갈던 반장파 군벌들도 장제스 제거를 일본 제국 타도보다 우선으로 두는 미친 짓은 안 했다.] 이후 일본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적극적으로 실시했으며 [[1939년 동계공세작전]] 직전 일본군의 역습으로 난닝을 잃고 참패를 당해서 4전구 사령관에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장제스의 만류로 자리를 유지했다. 이후 1939년 동계공세작전에 참여하여 일본군에 대한 유격전을 시행했다. 이후 6전구 사령관도 겸했으나 1944년 [[대륙타통작전]]이 일어나자 20만의 병력을 이끌고 맞섰으나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참패했다. 1945년 5월 26일, 일본군에 대한 반격을 실시하여 난닝을 점령했고 8월에 승전을 맞이하여 광저우에서 화남에 주둔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일본군 항복 이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무력으로 회수하기 위해 군대를 파견하여 11월부터 12월 사이 군대를 출동하여 마카오를 포위하고 마카오 내부의 소요를 종용했으나 마카오 식민당국이 반포르투갈 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영국을 통해 중재를 요청하자[* 포르투갈 당국은 마카오에서 중국 국민당의 공개 활동을 합법화해주겠다는 유화책을 제시했다.] 마카오 포위를 풀수 밖에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