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칭 (문단 편집) === 말년 === ||이 나쁜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지만, 죽음이 그녀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아돌프 히틀러|히틀러]]가 자살한지 4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옛 나치 추종자들이 있으며 또 새로운 나치 추종자들도 있다.|| || 1991년 6월 8일자 상하이 해방일보의 논평 中 || 투옥된 이후에 그녀의 행적은 절대 일반 인민들에게 공개되지 않았고 철저하게 비밀에 부쳐져 중국 국영 언론에서도 보도되지 않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84년 5월 4일 장칭을 가석방했다는 거짓보도를 하였으나 정작 1984년 8월에 중화인민공화국 법무부는 장칭의 가택 연금 요청을 기각하였다.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도 1988년 관영언론을 통해 장칭이 여전히 수감 중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결국 장칭은 죽을 때까지 병원 이외에는 감옥 밖을 나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1984년 9월에 마오쩌둥의 묘소를 참배하게 해달라는 요청이 거부되자 목구멍에 젓가락을 쑤셔 자살하려고 했고 1986년 5월에도 양말을 묶어 목을 매었다가 구조된 적이 있었다. 또 1988년 12월 수면제 50알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가 실패했으며 이 때문에 그 동안 지급되던 수면제가 금지되었다. 그녀가 투옥된 [[베이징 친청 교도소]]는 최고로 좋은 환경이었기 때문에 크게 불편한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도 그녀의 성질은 여전히 더러웠다. 장칭은 감옥안의 몇몇 요구사항들을 고쳐달라고 그녀의 딸 리나에게 요구하는 편지를 보낸적이 있었는데 리나가 거절하자 먹던 수박을 바닥에 던져 버리면서 욕을 했다고 한다. 덩샤오핑에 대해서는 그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중국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시작하자 1984년에 후야오방과 더불어 '합리적 지도자'라고 평가하는 등 비교적 누그러진 태도를 보이며 편지를 보내 남은 여생을 [[중난하이]]에서 보내게 해달라고 석방을 요청했다. 이러한 장칭의 요청에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장칭을 중난하이에 두면 장칭을 감시하기 편할 것이라는 의견과 정치 중심부에 장칭을 두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의견이 엇갈렸다.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리자 결국 덩샤오핑은 장칭의 석방 요청을 거부했다. 1984년 5월 장칭은 인후암 판정을 받고 치료를 위해 푸싱병원, 공안병원, 301호 일반병참부병원 등을 들락이며 치료를 받았다. 의사는 그녀에게 수술을 권유했지만, 장칭은 거절했다. 그녀는 수술로 인해 자신의 목소리를 잃게 될까 봐 두려워서 수술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장칭은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였으나 [[후야오방]]의 실각과 [[자오쯔양]]의 후계자 부상 및 민주화 요구가 강해지자 덩샤오핑의 지시로 1989년 3월에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89년 6월 천안문 항쟁이 발생하자 장칭은 다시 태도를 바꿔 마오쩌둥과 자신은 베이징 거리에서 군중을 살해한 적이 없었다고 덩샤오핑을 비난했고 중국 당국의 장칭에 대한 통제도 강화되었다. 이 시기 장칭은 10년만 있으면 다시 혁명노선이 부활할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으며 인민일보 기자들을 위한 비밀문건에는 장칭의 야심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쓰여 있다. 1989년의 정치적 위기가 끝난 이후 공산당은 장칭의 가택연금을 허락하고 주선교 거리의 2층 건물을 제공했다. 장칭은 중난하이의 마오쩌둥 거처나 조어대의 17호 별장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장칭은 자신의 목을 졸라대며 난동을 부렸다. 1990년부터 장칭은 회고록 집필에 들어갔으며 사위인 왕징칭의 회고에 따르면 많이 쇠약해져서 벽을 짚어야 몸을 가눌 수 있었다고 한다. 1991년 봄에 되자 장칭은 고열에 시달려 3월 15일에 베이징 공안병원에 리륀칭이란 이름으로 옮겨졌다. 이때 목수술을 다시 제안받았으나 "프롤레타리아 혁명 투사를 당신네들이 정성스럽게 치료할 것 같지 않아!"라고 빈정대며 거부했다. 이후 몸무게가 8킬로나 줄었으며 병원 치료소에서 지내며 흥분에 빠져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였으나 1991년 5월 10일에 어느 정도 완성된 원고를 스스로 없애버렸다. 그러다 1991년 3월 3일, [[장쩌민]]이 장칭에게 [[형집행정지]] 조치를 내려 풀려났지만 어차피 [[가택연금]] 상태에 놓였기 때문에 크게 다를 것은 없었으며 그해 봄 덩샤오핑에게 그가 세상에서 가장 큰 거짓말쟁이이며 마오 주석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기만했고 진정한 피고이며 결코 편히 죽지 못할 것이라는 저주의 편지를 보내 덩샤오핑을 격노하게 했다. 5월 13일, 장칭은 1966년 5월 13일 정치국 회의 25주년을 기념하여 인민일보 1면에 '역사상 기념비적인 날'이라고 쓴 다음에 유서를 써내려갔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인민은 마오쩌둥 주석의 영도 아래 국민당 반동분자들을 물리쳤으며 혁명의 승리를 쟁취했다. 오늘날 혁명은 [[덩샤오핑]], 펑전, 양상쿤 등의 수정주의 도당들에 의해 도둑맞았다. 주석은 [[류사오치]]를 제거했으나 덩샤오핑은 제거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인민과 국가에는 끝없는 재앙이 펼쳐졌다. 마오 주석, 당신의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5월 14일 새벽 1시 30분, 간호사가 쉬러 나가자 새벽 3시, 장칭은 화장실에서 손수건을 묶어 목을 매었다. 새벽 3시 30분에 간호사가 돌아와 장칭을 발견하고 조치를 취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후였다. 항년 77세였다.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에 그녀의 딸 리나가 저택에 달려와서 장칭의 시체를 보고 난 후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 5월 18일, 장칭의 시신은 화장되었다. 그녀가 죽었단 뉴스는 소식통을 통해 알음알음 퍼져 1991년 6월호 타임지가 서방언론 중에선 최초로 장칭 자살설을 보도했다. 이후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6월 4일이 되어서야 신화통신을 통해 이를 확인해주고 그녀의 죽음에 대해 조롱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다만 그녀의 죽음에도 몇 가지 의문이 있다, 그녀가 죽고서 약 2년 후인 1993년 초가 되어서야 그녀의 유서가 공개된 점이나 부검 결과를 발표하지 않은 것 등등의 의문점들이 많이 있는 편이다. 정적을 용서하지 않던 덩샤오핑이 그녀를 암살했다는 음모론도 꽤 있으나 증거는 없다. 암살 대신에 자살을 사주, 방조했다는 음모론도 꽤 거론되는 편이다. 여담으로 [[이원복]]은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장칭이 마오쩌둥 사망 이후 총살당했다는 잘못된 정보를 적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