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칭 (문단 편집) === 마오쩌둥과의 결혼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0px-Mao_and_Jiang_Qing_1946.jpg]] [[마오쩌둥]]의 결혼은 옌안시절 공산당의 큰 스캔들이었다. 단순한 마오쩌둥의 아내가 아닌 [[대장정]] 참가 용사인 [[허쯔전]]과의 이혼은 공산당 내에 심각한 논쟁을 불려 일으켰다. 무엇보다 장칭 그녀가 국민당 간수들과 매춘을 했다는 의혹을 가지고 있으며 장칭이 감옥에서 사상 전향 서약서를 쓰고 석방되었는데 이런 행위는 당에서 변절 행위로 여겨졌으며, 특히나 공산당 지도자 마오쩌둥과 결혼한다는 것은 당 전체의 이미지에 치명적인 타격이 될수 있었기에 당 내에서는 대표적으로 [[주더]]나 [[저우언라이]]는 결혼을 크게 반대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끝까지 장칭과의 결혼을 강행했고, 장칭과 동향 사람이던 공포정치의 대가 [[캉성]]이 장칭을 적극 지지했다. 하지만 캉성은 죽기 직전에 장칭 반대파로 돌아서서 장칭이 국민당의 간첩이었다는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마오쩌둥도 늙고 병들어 갈 때가 됐기 때문에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결국 타협점으로 당핵심은 장칭과의 재혼을 인정했지만 장칭의 정치진출을 막는다는 조건을 관철시켰다. 이때의 약속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문화대혁명]]까지 장칭의 정치적 족쇄가 되어 정치적 활동의 제약이 되었다. 하지만 1960년대에 문화대혁명에서 당 혁명소조부의 수장으로 일하면서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4인방]]이라 불리며 마오의 4번째 부인은 훗날 악명 높은 영부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대는 훗날 장칭이 문화대혁명 당시 주더와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간부들을 실각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그렇게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9년에 마오쩌둥과 장칭은 정식으로 결혼했고, 1940년에는 첫째 딸인 리나(李訥)가 태어났다. 종전 후 [[국공내전]]을 승리하고 1949년에 마오쩌둥은 국가주석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지도자가 되자 장칭은 사실상 퍼스트 레이디가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칭은 훗날 문혁 시대에 보이게 되는 광기와 히스테리를 보이지 않고 공손하고 예의바른 성품이란 평가를 받았었다. 허나 마오쩌둥과 결혼을 했지만 결혼 생활이 순탄치는 않았다. 마오쩌둥은 얼마 안 가서 장칭을 대신해 다른 여자를 계속해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상하이 시절 앓았던 우울증이 재발했다. 그 강도는 극심했다. 자신의 삶은 늘 불행했다는 열등감, 마오쩌둥에 대한 배신감, 언제 자신도 前 부인처럼 내쫓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옭아맸다.[* 이는 반란을 일으켜 집권한 자가 늘 또다른 반란을 두려워하듯, 자신이 저지른 일이니 더욱 뼈저리게 두려웠을 것이다.] 다정하던 장칭은 더 이상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남 몰래 울거나 화를 내는 일이 잦아졌다. 이때의 경험은 훗날 '''[[문화대혁명]]에서 지독한 잔인성을 보이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장칭이 변했다는 사실을 마오쩌둥도 모를 수가 없었다. 복잡한 여성 관계로 장칭과 사실상 별거 중이던 마오쩌둥도 장칭에 측은함, 혹은 이질감을 느꼈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장칭을 달래기 위해 그녀의 당 간부 및 정치활동을 허락했다고 한다. 장칭은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정무원 문화부 산하 영화사업지도위원회(电影事业指导委员会) 위원, [[중공중앙]] 선전부 영화처 처장 등 자신의 전공 분야인 영화 부문에 종사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