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췬 (문단 편집) == 한국 독립운동 지원 == 장췬은 1930년대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중국 침략에 따른 한국인 탄압과 관련하여 일본 당국과 협의를 진행했다. 1935년 일본군과 일제 만주국군이 치하얼성의 구위안(沽源)과 두스커우(獨石口) 일대로 침공했을 때, 장췬은 일본 측과 여덟 차례에 걸친 대일 회담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은 침공 이유를 중국 측의 대일친선 우호정책의 결여 때문이라면서 다음과 같은 사항을 요구했다. >1. 일본 비행기의 항행 자유 >2. 관세 인하 >3. 한인의 비법(非法) 행동 단속 >4. 일본인 고문의 채용 >5. 배일(排日) 언동의 단속 일제는 이러한 다섯 가지 요구조건을 배경으로 추후 중국이 이른바 배일주의 단속을 어떻게 시행하는 가를 주시하겠다면서 협의를 일단락 지었다. 장췬은 이 과정에서 불거진 일본 당국의 항일 한국인 문제를 원론적인 수준에서 동의했지만 한국인 독립운동가들과의 교류를 지속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장췬은 일본군으로 동원되었다가 포로가 된 한국인 청년들을 회유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1945년 중국 국민당 정부 군사위원회에서는 포로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한적(韓籍) 포로 활용에 관해 각 지역의 행영(行營) 주임과 전구 사령장관에게 전문을 하달했다. 이에 따르면, “중국정부가 각 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포로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사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접촉할 것을 청”하고, “포로수용소에 수감 중인 한적 인원에게 공작을 맡길 필요가 있을 때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통지”토록 되어 있었다. 당시 청두(成都) 겸 쓰촨성(四川省) 정부 주석을 맡으면서 위와 관련된 업무 수행에 적극 협력한 장췬의 활약은 중국 내 한국인들의 항일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일 항전에 상당한 도움을 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장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중화민국의 정치인]][[분류:쓰촨성 출신 인물]][[분류:1889년 출생]][[분류:199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인 출신 정치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