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춘차오 (문단 편집) === 1차 천안문 사태 === 1975년 1월 8일부터 1월 10일까지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10기 2차 전원회의에 출석한 장춘차오는 헌법 개정 보고를 했으며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국무원 부총리가 되었다. 이 2차 전원회의에서 덩샤오핑이 중공중앙 정치국 상무위원, 중공중앙 부주석으로 선출되어 정돈사업을 실시하자 장춘차오 등은 이것이 수정주의의 공범인 경험주의이며 교조주의보다 위험하다고 연일 비난했다. 1975년 2월 22일, 야오원위안과 함께 [[인민일보]]를 통해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무산계급 독재를 논함>이라는 33개 조목의 어록을 발표했으며 3월 1일 정치부 주임좌담회를 개최, 덩샤오핑이 이윤, 상금, 물질 자극과 같은 수정주의를 추구하면 [[류사오치]]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4월 1일, 마오쩌둥이 레닌이 무엇 때문에 자산계급에 대한 독재를 해야 하는지 대한 글을 쓰라는 지시에 따라[* 해당 지시는 1974년 12월 26일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에서 있었다.] <자산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독재를 논함>을 발표하여 자산계급의 모든 토성을 쳐부수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방광암에 걸려 죽어가던 마오쩌둥이 장칭을 내칠 것이라 여겨 [[캉성]]이 갑자기 장칭과 장춘차오를 공산당의 배신자였다면서 비난하고 나섰다. 그는 마오쩌둥의 비서 낸시 탕과 왕하이룽에게 장춘차오와 장칭의 부정부패에 관한 정보원을 소개시켜주며 마오쩌둥에게 전해달라고 했지만 마오쩌둥은 장칭을 당장 숙청할 생각도 없었고 캉성은 1975년 12월에 사망, 캉성의 고발은 흐지부지하게 묻혔다. 그의 고발은 4인방이 덩샤오핑의 사주로 덮어씌워버렸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4인방은 장례식을 검소하게 치른다는 구실로 추모활동을 탄압했으며 추모 보도를 금지했다. 1976년 3월 2일, 장칭은 12개 성, 자치구의 책임자들을 불러 회의를 열러 <풍경호 선박 사건> 관련 자료를 배부하며 덩샤오핑을 [[한간]], 매판자산계급과 지주자산계급의 대표자, 국제자본주의의 대리인으로 맹공격했다. 장춘차오도 덩달아 독점자산계급, 매판자산계급, 대내수정주의자, 대외투항주의자로 공격했다. 4인방의 횡포가 끝을 보이지 않자 전국적으로 장칭과 장춘차오를 타도해야 한다는 분노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급기야 1차 [[천안문 사태]]가 벌어지기에 이르렀다. 4월 5일에 소집된 정치국 회의에서 장춘차오는 덩샤오핑이 [[너지 임레]]와 같은 인물이라고 맹비난했다. 마오위안신은 덩샤오핑을 비판하는 마오쩌둥의 지시를 전달했다. 저우언라이가 죽은 후 총리 자리는 덩샤오핑도 장춘차오도 아닌 [[화궈펑]]이 차지했지만 덩샤오핑의 [[정돈 사업]]에 불만을 품고 있던 마오쩌둥은 1차 [[천안문 사태]]의 배후에 덩샤오핑이 있으며 덩샤오핑은 파시스트라는 4인방의 비난에 덩샤오핑을 다시 실각시켰다. 1976년 여름, 마오쩌둥은 정치국원들을 불러 모아서 "장칭을 도와서..."라고 말했는데 뒷말에 대해서 장춘차오와 왕훙원은 "홍기를 들고 가도록."이라고 했다고 주장했고 나머지 정치국원들은 "과오를 교정하도록."이라고 했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