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유소년기 === 하지만 장유차이는 놀기 좋아하는 한량이었고 잡화점은 잘 되지 않았다. 잡화점이 망했음에도 장유차이는 도박만 하다가 결국 도박빚을 갚지 못해 장쭤린이 14세 되던 해에 살해되었다. 이 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장쭤린은 매우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가난을 이기지 못한 장쭤린의 모친은 식구들을 거느려 친정인 봉천성 진안현 소흑산 이도구로 이주했으나 친정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데다가 먹여살릴 식구도 많았다. 이 때문에 교육을 받지 못하다가 어느 날 양징전(楊景鎭, 양경진)이란 사람이 하던 사숙에 숨어들어 도강을 하다가 양징전에게 걸렸다. 양징전은 이를 의아하게 여겨 장쭤린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묻자 장쭤린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의 이름은 장쭤린이며 공부하고 싶은데 집이 가난해 학교를 다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주 여기에 와 몰래 선생님 말씀을 들었습니다." 양징전은 장쭤린의 학구열에 감동해 그의 수업료를 면제하고 사숙에 받아주었으며 책과 공책을 사서 공부를 도와주었다. 하지만 장쭤린 역시 부친처럼 도박에 빠져들어 과자를 팔아 돈을 좀 벌다가도 그 돈을 도박장에서 쓰곤 했으며 모친의 강권에 목공일을 시작했으나 이내 싫증을 내며 그만둬버렸다. 결국 장쭤린은 먹고 살 길을 알아내기 위해 집을 나가 영구 고감진까지 흘러들어갔고 마차 점포의 잡일꾼으로 일하게 되었다. 여기서 당나귀를 치료하는 법을 배우게 된 장쭤린은 수의사로 일하게 되어 한동안 먹고 살 수 있었으나 여전히 가난했다. 그러다가 1894년 [[청일전쟁]]이 터졌다. 청군은 바다와 육지 양쪽에서 지리멸렬하게 당하고 있었는데 마침내 일본군의 제3사단장 [[가쓰라 타로]]는 12월 13일 해성을 함락했다. 해성은 봉천과 [[요동]]반도의 가운데 있어 양쪽에 위압을 가할 수 있고, [[산해관]](山海關)으로 가는 길도 뚫려 있어 만약 [[베이징]]까지 진격하고자 한다면 실로 요지였다. 다만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는 산해관을 돌파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태평천국 운동]]을 겪은 75세의 노장 쑹칭(宋慶, 송경)을 기용했다. 그는 여순에 주둔하는 의군(毅軍)을 이끌고 급히 내달렸다. 장쭤린은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여겨 20세의 나이로 쑹칭이 조직한 의군에 입대, 마위쿤(馬玉崑, 마옥곤) 휘하의 기병이 되었다. 말을 잘 다뤘던 장쭤린이라서 장쭤린은 곧 초장에 발탁되었으나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는 통에 장쭤린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 천둥벌거숭이로 지낼 때보다야 그럭저럭 여유가 생겨, 1895년에는 21세 나이로 지주 집안의 둘째 딸 자오춘구이(趙春桂, 조춘계)와 결혼하였다. 고향에서 나름대로 한가하게 지내던 장쭤린이었지만 그는 무미건조한 생활에는 쉽게 싫증을 내던 사람이었고, 다른 일이 없을까 하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