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장제스의 북벌]], 허망한 최후를 맞이하다 === 그러나 1925년 강소독판 [[양위팅]]과 안휘독판 [[장덩쉬안]]의 학정 끝에 절강독판 [[쑨촨팡]]이 [[손봉전쟁]]을 일으켜 봉천군벌은 강남에서 축출당했고, 또한 장쭤린의 참모장이었던 [[궈쑹링]]은 그가 일본과 매국적인 밀약을 했다고 [[양위팅]]의 해임을 요구하며 장쭤린에게 [[반봉사건|반란]]을 일으켰다. 거기다 쫓겨난 펑위샹은 다시 군대를 몰아 장쭤린을 치려고 했고, 이에 장쭤린은 [[우페이푸]]와 손을 잡고 [[펑위샹]]을 내쫓는다. 우페이푸가 더이상 장쭤린에게 덤빌 힘이 없는 이상 장쭤린은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될 수 있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장제스는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언했고 [[우페이푸]], [[쑨촨팡]]을 몰락시키고 장쭤린과 대결했다. 국민당은 내부 갈등 때문에 분열되어 잠시 내분에 휩싸였지만 [[영한합작]]으로 복귀하고 이전에 갈라진 [[서산회의파]]까지 다시 합당하여 장쭤린에 맞섰다. 장쭤린은 1927년 6월, [[쑨촨팡]], [[장쭝창]]의 추대를 받아 대원수에 취임하여 [[판푸]]를 국무총리에 임명하여 맞서려 했으나 1928년에 선포된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선 펑위샹, 옌시산 등까지도 모두 북벌군에 합류했고 장쭤린은 장쭝창, 쑨촨팡 등과 손을 잡고 장제스군에 맞섰지만 결국 패배했다. 장쭤린은 베이징을 버리고 다시 동북으로 돌아가 [[권토중래]]를 노리지만 동북을 향해 침공하려는 일본 관동군은 장쭤린이 탄 기차를 폭파시켜 그를 죽이고 말았다. 일본 요시자와 공사가 장쭤린에게 매국적 협약을 승인한다면 북벌군을 격퇴해 주겠다고 제의했지만, 장쭤린은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이는 더 이상 일본의 요구를 듣는 것은 설령 국민혁명군을 격퇴해도 결국 일본의 허수아비가 되는 것에 불과했고 장쭤린은 이미 장제스에게 굴복하는 대가로 동북 3성 통치만은 인정받기로 밀약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 폭발 사건을 현장의 지명을 따서 \''''[[황고둔 사건]]'''(皇姑屯 事件)'으로 부른다. 장쭤린은 폭발 직후는 즉사하지 않아서 이송했으나 이미 치명상을 입어서 생존 가능성이 없었다. 장쭤린은 당분간 이 사건을 비밀에 부치게 하고 권력을 장남 [[장쉐량]](장학량)에게 승계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했다. 그의 사후 그의 뒤를 이은 장쉐량은 동북지방의 문턱까지 쳐들어온 공산당과 국민당의 북벌군을 이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일본과 손잡아 북벌군을 상대했다간 중국에서 끓어오르는 민족감정 때문에 자신의 정권이 무너질 것이라는 것을 파악하고 국민당과 일본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양쪽을 설득하여 [[동북역치]]를 통해 국민당에 복종하였다. 이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장제스 편으로 가담하여 중국 대륙의 패권은 쑨원의 유지를 계승한 [[장제스]]가 쥐게 됐다.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장쭤린, version=201)] [[분류:장쭤린]][[분류:인물별/생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