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와신상담 끝에 정점에 서다 === 장쭤린을 꺾은 우페이푸는 명실상부 중원의 패자가 되었고 미국의 타임지에서는 우페이푸를 중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로 선정하기도 했다. [[파일:attachment/장쭤린/오패부.jpg]] 그러나 승리한 직예군 내부에서는 리더인 차오쿤과 우페이푸 그리고 펑위샹 사이에 반목이 생기기 시작했다. 차오쿤은 우페이푸가 자신을 점점 무시하고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졌고 둘의 관계는 상당히 껄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는 다른 직예파의 군지휘관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이들은 동료인 우페이푸가 자신의 위에 서 있는것을 아니꼽게 여겼으며 그 중에서 펑위샹이 가장 심했다. 펑위샹 역시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으며 봉직전쟁에서 탁월한 공을 세웠지만 우페이푸는 그러한 그를 견제하려 했고, 결국 펑위샹은 하남 독군의 자리에서 쫓겨나 북경의 육군 검열사라는 명예직으로 옮기게 됐다. 결국 1924년 9월 봉계군벌과 환계군벌 그리고 광동정부의 쑨원이 반 직계군벌 삼각동맹을 결성하였고, 그간 [[와신상담]]을 하고 있던 장쭤린은 [[직예군벌]]이 [[안휘군벌]]인 절강독군 [[루융샹]]을 토벌하기 위해 [[강절전쟁]]을 일으키자 루융샹을 돕는다는 구실로 관내진출, 9월에 제 2차 직봉전쟁을 일으켰다. 우페이푸는 펑위샹에게 장쭤린을 막으라고 했지만, 펑위샹은 오히려 산해관 근처에서 말머리를 돌려 우페이푸를 공격하는 [[북경정변]](北京政變)을 일으켰다.[* 이때 [[핍궁사건]]이 일어나 [[선통제]]를 비롯한 청나라 황실이 [[자금성]]에서 쫓겨났다.] 그 결과 제 2차 직봉전쟁은 장쭤린의 승리로 끝난다. 북경을 장악한 펑위샹을 내쫓은 장쭤린은 여세를 몰아 남쪽으로 진격하고 [[제노전쟁]]을 통해 루융샹, 장쭝창이 선봉으로 10만의 병력으로 산동성을 장악하고 이어 상하이와 난징, 안후이성까지 장악하게 됐다. 이 때가 바로 장쭤린의 [[리즈시절]]이었다.[* 참고로 우리가 한국사 시간에 한번 배웠을 미쓰야 협정은 이 다음해인 1925년에 맺어졌다.] 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우호적으로 만들고 재정도 충당할 겸 1925년 일본과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고, 한국독립군을 잡아서 현상금을 받는 형식으로 장쭤린은 일본의 한국 독립운동 탄압에 앞장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