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1차 직봉전쟁]], 그리고 패배 === 이런 장쭤린을 막아서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바로 직예파의 [[우페이푸]](오패부)였다. 우페이푸는 1874년 산동성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학 교육을 받은 그는 22살에 과거 시험에 합격했으나 관료 대신 군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북양군벌의 양성소라 할 수 있는 보정육군속성학당에 들어갔다. 그 후 1907년 장춘에 주둔한 차오쿤의 북양군 제3진에 배속되었다. 차오쿤은 유능하고 야심이 넘치며 명석한 엘리트인 우페이푸를 당장 자신의 오른팔로 삼았다. 직예파의 에이스가 되고 직환전쟁에서 돤치루이를 꺾은 그는 장쭤린을 언젠가 반드시 꺾어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그것은 장쭤린도 마찬가지였다. 양자간의 전쟁의 빌미는 내각구성에서 터졌다. 직환전쟁 이후 내각을 맡은 [[진윈펑]]은 당시 재정난을 도무지 해결할 능력이 없었다.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는 상황에서 진윈펑은 국내 자본가들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해외로부터의 차관 획득에도 실패했다. 이로 인해 정부 부처는 물론이고 군대도 몇 달씩 월급이 체불되어 아우성이었다. 북양정부는 마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직예파는 그가 봉천파에게 특혜를 준다고 생각했고 장쭤린은 장쭤린대로 진윈펑은 직예파의 끄나풀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진윈펑은 직예파와 봉천파 양쪽 모두에게 신뢰를 잃고, 1921년 12월 18일 해임되었다. 장쭤린은 쉬스창에게 건의를 해 교통계 양사이 내각을 구성하지만, 우페이푸는 그가 [[위안스카이]] 내각에 있었을 당시 친일매국적인 활동을 했다고 선전해 대국민적 분노를 일으켜 그를 자진사퇴시키고 자신의 입맛에 맞는 내각을 구성시키는데 성공한다. 이에 장쭤린은 직계에 밀려났던 환계의 수령 [[돤치루이]],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던 2차 광동정부의 [[쑨원]]과 손을 잡고 전쟁을 일으켰다. 제1차 봉직전쟁은 1922년 4월 26일부터 5월 5일까지 벌어졌다. [[우페이푸]]는 청나라 시절부터 군대에 있었고 직환전쟁을 통해 실전경험이 많았지만, 장쭤린을 포함해 대부분의 봉천군은 동북지방에서 마적질이나 소규모 전투밖에 경험하지 못해 이런 대규모 전투경험이 없었고 결국 장쭤린은 탈탈 털리게 됐다. 이 싸움에서 12만 명의 봉군은 3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2만 5천명이 투항했으며 5만 명 이상이 싸우지 않고 전선을 이탈하였다.[* 다만 장쉐량의 제3혼성여단과 궈쑹링의 제8혼성여단은 일본 군사고문단에 의해 훈련받은 봉군 최정예 부대였으며 궈쑹링(郭松齡)은 북경 육군대학 출신으로 봉군 지휘관 중에서 실전 경험이 가장 풍부하였다. 제1차 봉직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들 부대는 거의 온전하게 돌아왔다.] 직예파가 운용하는 항공기와 발해함대로 인해 장쭤린보다 직예파의 화력이 더 우월했던 것도 한 몫을 했다. 쑨원 역시 [[천중밍]]이 우페이푸와 결탁하여 [[영풍함 사건]]을 일으키는 통에 축출되었다. 다행히도(?) 장쭤린의 뒷배경이었던 일본이 우페이푸가 산해관을 넘어 장쭤린을 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통첩을 날렸고, 그 덕분에 장쭤린은 우페이푸와 강화를 맺고 중원의 모든 기반을 잃는 대신 자신의 원래 기반인 동북 3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그는 봉천군을 대대적으로 개혁하고 일본의 원조를 얻어 동북 3성에 대한 근대화와 공업화에 착수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