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쭤린/생애 (문단 편집) === 군벌의 중심세력이 되다 === 1917년 [[장훈복벽]]이 일어나자 [[돤치루이]]는 이를 12일만에 진압했다. 하지만 [[장쉰]]이 해산한 국회와 약법의 복구를 거부하면서 [[쑨원]]이 서남군벌 [[탕지야오]], [[루룽팅]]과 연합하여 [[1차 호법운동]]을 전개했다. 돤치루이와 [[쉬수정]]이 이를 강경하게 진압하려고 나서면서 1917년 [[호법전쟁]]이 발발했다. 장쭤린은 환계와 연합하여 호법전쟁에 참여, 북양군벌 내부의 입지를 다진 후에 회군했다. 1918년 9월 7일 대총통 쉬스창은 장쭤린을 동북3성 순열사에 임명하였다. 장쭤린은 1919년 길림독군 [[멍언위안]]을 축출한 후 자신의 부하인 [[쑨리에천]](孫烈臣)과 사돈 바오구이칭(鮑貴卿, 포귀경)을 각각 흑룡강성 독군과 길림성 독군으로 임명하였다. 그의 세력은 하늘에 떠오르는 태양처럼 나날이 뻗어나갔다. 실패라곤 없었다. 장쭤린의 봉천파는 북양정부의 양대 세력인 [[돤치루이]]의 안휘파와 [[차오쿤]]의 직예파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1920년 6월 안휘계와 직예계의 갈등이 심해지자 대총통 [[쉬스창]]은 직예독군 [[차오쿤]], 강소독군 [[리춘]], 장쭤린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차오쿤과 리춘은 거절했으나 장쭤린은 중재 요구에 응해 베이징을 찾아왔다. 하지만 안휘계 [[쉬수정]]이 자신을 암살하려 시도하자 봉천으로 퇴각하여 안휘계에 대한 군사를 일으켰다. 7월에 터진 [[안직전쟁]]에서 장쭤린은 직예파의 편을 들어 승리하자 그의 야심은 더욱 커졌다. 기회를 보아 직예파를 몰아내고 중원에 자신의 깃발을 꼽겠다는 꿈에 부풀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