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장쭤린 (문단 편집) === 한국 === >일본은 1904년 [[러일전쟁]] 승리 이후 철도와 광산개발 등 만주에서의 이권 확대와 지배력 강화에 전력하였으며,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을 거치면서 북만주와 외만주의 대부분, 그리고 바이칼호 주변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특히 1911년 신해혁명 직전 '''[[손문]]의 “중국혁명의 목적은 멸만흥한이기 때문에 건국은 장성 이남을 영역으로 하면 된다. 만몽은 일본이 취하면 될 것이다. 만약 일본이 혁명을 지원한다면, 중국은 만몽을 포기하고 일본에 할양할 것이다.”'''라는 언급은 일본의 만주진출을 고무시켰다. 하지만 '''중국의 민족주의 운동과 장쭤린 정권의 방해로 일본의 독점적인 만주지배는 실현되지 못하였다.''' >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일본은 장쭤린 제거와 [[관동군]]을 동원한 [[만주국]] 건설에 착수하였다. 일본의 만몽지배를 중국군벌이 극력하게 방해하고 있다고 [[이시와라 간지]]가 지적한 바 있는데 실제로 당시 만주의 군벌 장쭤린은 소위 친미일탈적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미국이 장쭤린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만주진출을 본격화하게 되자 이 지역에서 일본의 이익과 상충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만주사변의 배경에는 장쭤린의 친미일탈노선, 국민당과 공산당의 만주공략에 따른 일본의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소련의 남하에 자극받은 관동군은 장쭤린을 [[황고둔 사건|1928년 6월 5일 봉천역 인근 만철선 교차지점에서 전격적으로 살해하였다.]] >---- >채수도, 「이시와라 간지의 만몽구상에 대한 연구 - 팽창논리의 전개과정을 중심으로 -」, 『일본어문학』 77집(2017), p. 383-384 [[http://doi.org/10.21792/trijpn.2017..77.01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