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쭝창 (문단 편집) === [[2차 직봉전쟁]]에서 [[직봉풍전쟁]] === 1922년 요녕진수사, 길림성방군 제3 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고 용맹함으로 인해 장쭤린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토비, 적 군벌 패잔병, [[러시아 내전]] 와중에 중국에 들어온 백군을 대거 흡수하여 많은 부하들을 거느리게 되었다. 1924년 [[2차 직봉전쟁]]에 동북군 제2군 부군장으로 참전, 10월 22일 란저우를 공격해 28일에 점령했고 직군의 패잔병을 대거 흡수하여 휘하 병력을 증강시켰다. 2차 직봉전쟁 이후 직예군벌의 발해함대가 항복하지 않자 동북해군 부사령관 심홍렬과 함께 경호대를 거느리고 발해함대의 조화호에 탑승하여 경호대를 동원해 조화호를 장악한 후 발해함대를 손쉽게 동북군에 귀순시키기도 했다. 1924년 11월 24일 [[돤치루이]]가 임시집정에 취임하여 임시정부가 수립된 이후 1924년 12월에 발발한 [[제노전쟁]]에서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소환선무사 [[루융샹]]과 함께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격파하고 상하이를 점령했다. 장쭝창은 필서성을 해군사령관에, 왕기를 재무담당에 임명하여 상하이를 장악한 이후 자신의 친구인 청방 두목 황진룽, 두웨성 등과 어울리며 영국 조계지의 삼마로 회중여관에서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 장쭝창이 워낙 주색잡기를 좋아하고 사치스러운데다가 성격이 포악한 것을 걱정한 장쭤린은 장쭝창을 상하이에 두었다간 열강과 충돌할지도 모른다고 여겨 산동을 산동인이 다스려야 한다는 명분으로 산동군무독판에 추천하였다. 장쭝창은 부유한 상하이를 떠나야 한다는 점이 불만스러웠으나 일단 군말않고 산동독판에 취임, 직로연군총사령관에 임명되어 산동성을 장악하고 산동왕으로 떵떵거렸으며 소환로 3성 토비 총사령관, 동북 해군 사령관에 임명되는 등 봉천군벌의 핵심인물 중 한 사람으로 떠올랐다. 이때 많은 첩을 거느리고 횡령, 약탈, 전횡을 일삼아 민중에게 큰 고통을 주어 원성을 샀다. 또한 미신을 신봉하여 전투 전에는 꼭 공자에게 제사를 지냈고 비가 오면 하늘에 대포를 쏘았다. 이후 [[손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촨팡]]과 교전했고 [[반봉사건]] 때 [[궈쑹링]]과 결탁했던 [[펑위샹]] 휘하의 국민군 2군과 3군이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고 [[리징린]]을 공격하자 [[리징린]]은 장쭝창에게 직예성을 넘겨줄테니 도와달라고 청했다. 이에 장쭝창은 직로연군을 조직하여 리징린을 부사령관에 임명, 베이징과 톈진을 공격하였다. 돤치루이는 장쭝창을 2방면군 군단장에 임명하여 펑위샹 토벌을 명령했고 1926년 [[옌후이칭]] 내각이 출범하자 6월 26일, 장쉐량, 왕회경 등과 함께 베이징에 입성, 28일에 순승왕부에서 우페이푸, 장쭤린의 회담에 참여했다. 1926년 [[옌시산]]과 함께 [[직봉풍전쟁]]에 참전했다. ||[[파일:봉천군벌순승왕부회의.jpg]]|| || 순승왕부 회의 기념사진. 2번이라고 적힌 키큰 남자가 장쭝창이다. || 이 기간 내내 특유의 불량한 행실을 고치지 못해 잔인한 행동을 많이 했으며 사람을 함부로 죽였고 그의 휘하의 군사들은 군기가 불량하기 이를데 없었다. 성향 또한 반동적이라 신사상을 싫어하여 [[쑨원]]을 비롯한 일부 사람들이 지나치게 유럽을 숭상하여 권리만 찾고 의무를 모른다며 반서양문화의 태도를 보였으며 심삽경을 간행, 산동성에 보급하여 산동의 대학생과 중학생들에게 유교경전을 읽을 것을 강요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