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후이 (문단 편집) === 중일전쟁 시기 === [[중일전쟁]]이 발생하자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난징 전투]]가 벌어지자 일본군에게 난징을 공격하지 말 것을 호소하면서 중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할 것을 호소하며 필요하다면 자신이 중국과 일본의 중재자로 나서겠다고 제안했지만 씹혔다. 1938년, 경제부대신 한윈지에를 로마에 파견하여 [[비오 12세]]를 알현하게 했으며 교황청 국무경 에우세비오 파첼리 추기경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전달했다. >로마 교황청 국무장관 에우세비오 파첼리 각하. >신앙과 도덕을 위해 공산주의를 부인하는 것이 기독교의 사명입니다. 공산주의자가 파괴하는 평화와 문화를 구제하여 확립하는 것이 만주 제국의 이상입니다. 귀 교황청에서는 우리나라와 중화민국을 구분하여 하나의 독립 포교구로 설립하였습니다. 즉 저는 건국의 이상을 이해하고, 독립이 엄연한 사실의 결과라고 인식하고 있습니다. 저와 우리 국민은 충심으로 감사합니다. 저는 교황청과 우리나라는 우호 관계를 공고히 하고, 또 세계의 평화와 인류복지를 목표로 공동으로 이상을 조기에 실현시키기 위하여 절망을 하지 않습니다. >저의 이 서신을 만주제국 수호경제사절단장 한윈지에 각하가 각하에게 경의를 표하며 전합니다. >대만주제국 국무총리대신 장징후이 >강덕 5년 7월 29일 1940년, [[왕징웨이 정권]]이 수립되자 난징을 방문하여 [[왕징웨이]]와 회담하고 일본과의 '동고동락, 동주공제'를 주장하였으며 1941년 [[태평양 전쟁]]의 발발도 지지했다. 시키지도 않는데도 일본에 아첨, 아부를 멈추지 않아서 '만신노골'이라는 조롱을 받았으나 마쓰모토 마스오에 따르면, 알게 모르게 [[오족협화]]를 주장하면서 중국인을 멸시하는 일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장징후이는 일본어를 한마디도 몰랐으나 일본인들이 중국인을 대하면서 멸시하는 것은 알 수 있어서 그때마다 "우월감!"이라고 외치면서 일본인을 꾸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개척 이민을 위해 중국인 농부들의 땅을 강제로 매수하는 일을 줄이기 위해 척무대신 [[고이소 구니아키]]에게 호소하였으나 별 효과는 보지 못했다. || [[파일:wwii greater east asia confedence.jpg|width=100%]] || ||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에 참석한 장징후이, 왼쪽에서 두번째 인물이다. || 1942년 만주국 건국 10년을 기념해서 방문한 [[윤치호]], [[최남선]] 등을 만났으며 자신이 쓴 기념사가 수록된 신경만주학해사에서 출간한 <반도사화와 낙토만주>에 표지 글씨를 써주었다. 1943년, 대동아회의 참여를 위해 도쿄에 방문하여 [[완 와이타야콘]], [[왕징웨이]], [[바 마우]], [[호세 라우렐]], [[찬드라 보스]], [[도조 히데키]] 등 일본 제국과 괴뢰국 대표들을 만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