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징후이 (문단 편집) === [[한간]]이 되다 === 9월 18일 [[만주사변]]이 터진 후 9월 27일, 하얼빈에서 동삼성특별구 치안유지회를 조직하고 스스로 위원장에 취임하였으며 1932년 1월 1일, 흑룡강성 정부를 조직, 1월 6일, 흑룡강성 정부주석에 취임하여 본격적인 만주 독립을 주장하게 되었다. 하지만 [[장쭤샹]], [[마잔산]], [[완푸린]] 등 독립반대론자들이나 아예 [[아이신기오로 시치아]]처럼 [[청나라]] 복벽을 주장하는 군벌들과 충돌했다. 이에 [[짱스이]], [[아이신기오로 시치아]]와 연합하여 연성자치, 독립국가 건설을 주장하며 [[이시와라 간지]]의 만몽영유론과 맞섰다. 결국 독립을 주장하는 군벌들이 힘을 얻으면서 이시와라도 만주국 건국에 찬성하게 되었고 일본군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서 국제적 관심을 상하이로 돌린 후 괴뢰국 수립을 위한 물밑작업에 들어갔다. 관동군 막료들은 1932년 2월 5일, 건국회의를 개최하여 [[만주국]] 건국을 준비했고 2월 16일, 봉천의 장징후이의 저택에서 동북 행정위원회를 조직했다. 장징후이는 동북 행정위원장에 추대되었으며 2월 18일, [[국민정부]]와의 단절을 선언하고 동북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3월 1일, [[만주국]] 건국을 선언하기에 이름으로 본격적인 [[한간]]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선통제]]를 만주국의 수장으로 옹립하기로 결정되자 일본군으로부터 선통제 옹립 지지파로 기대를 받았으나 정작 장징후이는 선통제 옹립은 시대착오적으로 보아 군벌인 짱스이를 만주국 수장으로 옹립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의견을 보였다. 이후 짱스이, 마잔산, 자오신보와 같이 입헌공화제를 주장하였고 결국 양보를 보아 [[돤치루이]]가 1924년에 만든 용어인 집정이라는 칭호로 합의를 보았다. 이후 [[선통제]]가 집정으로 취임하고 [[정샤오쉬]]가 1대 국무총리에 임명되자 정부에서 동성특별행정구 장관, 군정부총장 등을 역임하면서 군정부를 중심으로 권력을 장악하였다. 하지만 1934년 10월, 4성제를 10성제로 개편하면서 흑룡강 성장직에서 해임되었고 이 때문에 권력에서 밀려나서 참의부 의장이라는 명예직만 받고 '가을석양같다'는 평가를 받으며 뒷방 늙은이 신세로 전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