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진군 (문단 편집) == 역사 == [[옥저]] 일부였고 [[고구려]]에 복속되었다가 [[진흥왕]] 때 [[신라]]가 차지한 최북단 지역으로, 장진군 남부의 [[황초령]]에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를 세워 지금도 남아있다. 이후 [[발해]] 영역이었다. [[고려]]시대에 [[여진족]] 영역이었다가 이후 북진해 점령하고 갑주만호부(甲州萬戶府, [[갑산군]])와 [[함흥부]]에 편제했다. 조선초기에 갑주만호부가 갑산도호부로 개편되고 일부가 [[삼수군]]으로 분리되며 고려시대에 갑주만호부에 편입된 지역이 이에 속했다. 1665년(현종 6)에 함흥부 한후구비사(漢厚仇非社, 한덕구비사?)에 장진보수책(長津堡樹柵)을 설치하고 별장을 배치하면서 지금 지명인 장진이 처음 생겨났다. 장진(長津)은 [[황초령]], 설한령, 한대령, 세 고개에서 흘러나온 물이 이 곳에서 합류해 [[압록강]]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1667년에 관찰사 민정중(閔鼎重)이 보(堡)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장진책(長津柵)을 두고 순영(巡營)에서 별장을 파견하였다. 1758년(영조 34)에 약 1리 떨어진 곳으로 보를 옮겼고, 1784년(정조 8)에 함경도감진사(咸鏡道監賑使) 이재학(李在學)이 건의로 보를 혁파하고 절제진(節制鎭)으로 삼았다. 이듬해(1785년) 7월에 진을 지금 서하면 적수리 왕인봉(旺人峰) 아래로 옮겼다. 1787년(정조 11)에 관찰사 정민시(鄭民始)가 읍으로 승격시킬 것을 청하자 이해 8월에 변지독진도호부(邊地獨鎭都護府)를 설치하였다. 1815년(순조 15) 다시 진을 영덕산(永德山) 밑으로 옮겨 별해진(別害鎭)으로 삼았다. 1843년(헌종 9)에 백성이 적어져 읍의 형태를 이루지 못한다고 하여 첨사진(僉使鎭)으로 격하시켰다가 1859년(철종 10)에 개척민이 모여들자 관찰사 윤치수(尹致秀)의 청을 받아들여 다시 독진도호부로 복구시켰다. 1895년에 [[23부제]] 시행으로 강계부 장진군으로 개편되고, 1897년에 함흥부 북부와 삼수군 남부를 갈라 장진군을 설치하였다.[[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8816|#]][[http://dh.aks.ac.kr/sillokwiki/index.php/%EC%9E%A5%EC%A7%84%EB%B6%80(%E9%95%B7%E6%B4%A5%E5%BA%9C)|#]] 해방 전 면적이 5,112.67㎢로서 [[함경북도]] [[무산군]], [[평안북도]] [[강계시|강계군]]에 이어 '''한국에서 3번째로 넓은 군'''이었다. 1914년 이전에 [[신흥군]](현 [[부전군]])으로 동상면이 편입되기 전이었으니 5,688㎢이나 되었다. 1920년대에 함흥 일대의 전력 공급을 위해 [[압록강]] 지류인 장진강 상류를 막은 [[장진호]]가 건설됐다. 그 때 군청 소재지였던 군내면 읍상리가 수몰되어 군청이 신남면 경하리로 이전, 장진면으로 개칭하였고, 군내면도 동문면으로 개칭하였다. 아울러 [[6.25 전쟁]] 중에는 [[미 해병대]]에게 악몽 같은 겨울을 보여준 [[장진호 전투]]의 무대가 되기도 했었다. 이후 북한 정권에서 동문면 일대가 [[랑림군]]으로, [[부전강]] 유역이 [[부전군]]으로 넘어갔다. 북한에서 그리 특출나지 않은 깡촌지역이지만 [[감자]]가 매우 많이 생산되고, 2010년대 중후반 들면서 새로운 판로를 보이고 있는지 크게 발전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