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지연 (문단 편집) == 생애 == 장지연은 1864년 11월 30일 [[경상도]] [[상주시|상주목]] 내동면 동곽리(현 [[경상북도]] [[상주시]] 인봉동·성동동 근처)에서 아버지 장용상(張龍相, 1839 ~ 1887. 10. 17)과 어머니 [[문화 류씨]][* 류성림(柳成霖)의 딸이다.] 사이의 [[무녀독남]]으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5년 6월에 향시(鄕試) 응제과(應製科)에 합격했으나 가을에 치러진 회시에서 낙방했으며 이후에도 [[과거 제도|과거]]에 4차례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하였다. 1894년 2월 식년 [[진사|진사시]]에 3등 683위로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c_1894_040306|입격했으나]] 이 무렵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을미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각지에 발송했다. 1897년 1월 [[아관파천]]으로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대한제국)|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의 제소를 맡았고 1897년 2월 [[덕수궁|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에게 [[황제]] 즉위를 청하는 [[상소]]문 초안을 짓고 독소를 맡았다. 1898년 4월에는 <경성신문>을 인수해 <대한황성신문>으로 개칭하여 발행에 참여했고 9월에 <[[황성신문]]>으로 개편할 때에도 참여했으며 1898년 10월 [[독립협회]]에서 주관하는 만민 공동회에 참여해 이틀째부터 총무 위원으로서 활동했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바로 다음 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을사조약을 규탄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을 게재했다. 이 사건으로 11월 21일 투옥되었고 이어 <황성신문>도 정간되었는데 1906년 1월 석방되었으나 <황성신문>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 후에도 장지연은 구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수많은 교육 활동에 앞장섰으며 1907년에는 '애국 부인전'이라는 책을 냈는데 바로 [[잔 다르크]]의 이야기이다. 이를 통해 초기 [[신채호]]처럼 [[역사]]적 인물로서 애국 영웅 정신을 고취시키려 했던 것을 알 수 있으며 이것이 한국 사상 최초로 잔 다르크라는 인물이 언급된 사례이다. 친일 단체 [[일진회]]와 정면으로 대립했던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를 계승한 단체로 후에 일진회와 타협해 국권 피탈 후 해산한다.]의 간부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조신문>을 발간하면서 1년 가량 머물렀고 이후 귀국해 [[경상남도]] [[진주시|진주]]에서 1910년 [[경술국치]] 직후 [[황현]]이 자결하면서 남긴 '절명시'를 실었다가 폐간되기도 했던 <경남일보> 주필로 일했다. 그러나 1914년부터의 행적 탓에 논란이 상당하다. 1914년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라는 [[조선총독부]] 인사의 권유로 조선총독부 어용 신문사인 <매일신보>의 주필로 활동을 시작하면서 [[친일]] 한시와 사설 730여 편을 기고했던 것 때문이다. 친일 전력이 밝혀진 후 관련 연구 학자 대다수와 여론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친일 행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언론 활동을 두고 장지연은 '1. 객원으로 대하고 사원으로 대하지 않는다, 2. 원고 내용은 "일사유사",[* 장지연이 편찬한 조선 시대 중ㆍ하층민들의 열전.] 종교 풍속에 한정하고 신문사 안이 아닌 밖에서 작성해 보낸다, 3. 아베 미쓰이에가 귀국하면 자신도 신문사 활동을 마친다'는 조건에 입각해 활동하는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실제로 <매일신보>에 발표된 논설이나 작품에는 조선총독부의 시정에 호응하는 정치성을 띤 연설이 많다. 이 때문에 독립유공자 서훈이 취소됨은 물론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1918년 12월 1일자 <매일신보>에의 논설 기고를 마지막으로 1919년 4월 경상남도 [[양산시|양산군]]을 유람했으며 [[3.1 운동]]이 발생했지만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1921년 초에 생활 습관으로 결국 술병이 들었는데 [[일본]] 외무성의 문서에 의하면 1921년 5월경 [[시베리아]]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김경천의 초청을 받고 [[블라디보스토크]] 인근 마을인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했다고 한다. 이후 술병으로 인한 병세가 심해지자 음식을 줄이고 술을 끊으면서까지 치료에 몰두했지만 결국 1921년 10월 2일 사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