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준하 (문단 편집) == 여담 == * 유족들은 중정 등의 방해로 인해 취업조차 못 하고 한동안 가난하게 살아왔고, 자식 5명은 국내외로 흩어졌다. 특히 장남 장호권은 부친 사후 진상규명을 시도하려다 중정 등의 방해로 인해 말레이시아로 피신했고, 1979년 박정희 사후 귀국했지만 신군부에 의해 고문당한 뒤 싱가포르에서 망명 생활을 해왔다. 2004년 귀국 후 (주)장준하사상계를 세워 2005년에 웹진 를 창간한 후 2012년까지 운영했으며 2007년에는 종이잡지로 복간 시도도 했지만 복간준비호만 내고 정식 복간은 못했다.([[https://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7319.html#cb|한겨레]], [[https://m.khan.co.kr/article/200801231527121/?mode=view#c2b|경향신문]]) * 2007년 7월 11일 고인을 암살하였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박정희의 딸 [[박근혜]]가 고인의 아내 김희숙 씨를 만나 사과하였다. 당시 박근혜는 “진심으로 위로드린다. 장 선생이야말로 누구보다도 애국심이 뜨거우셨고 [[민주주의]] 열정을 갖고 계셨던 분이다. 저의 아버지와는 반대 입장에 계셨고 방법은 달랐지만 두 분 다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셨다고 믿고 있다.”라고 했다고 한다. 박근혜의 유족 방문에 관한 전후 정황은 고인의 장남 [[장호권]]씨의 인터뷰를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20101024153243&Section=01&page=0|참조]]할 것. 그러나 고인의 장남 장호권 씨는 박근혜에 대해 "인간으로서는 용서하지만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는 용서하지 못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이는 박근혜가 정치적으로 아버지인 박정희와 그 세력을 대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유족 장호권씨의 자세한 입장은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045|해당 기사]]를 참조할 것. 당시 박근혜를 수행했던 [[참모]]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는 장준하의 부인인 김희숙 씨와의 만남을 내키지 않아했다고 한다. 당시 둘이 만났을 때 분위기도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듯 [[http://m.khan.co.kr/view.html?art_id=201209032158265|어색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박근혜는 김희숙 씨를 만난 자리에서 장준하의 의문사에 대해 "역사가 말해줄 것"이라고 답했지만 막상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된 뒤에 장준하의 타살 의혹이 불거지자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며 "이전 정부에서 조사가 다 이루어졌고 이미 끝난 사안이 아니냐"면서 책임을 회피하여 김희숙 여사를 비롯한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2006814|유족들의 분노를 산 바 있다.]] 2015년 [[삼일절]] 고인의 3남인 장호준 씨가 박근혜에게 보내는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85789|서신을 공개했다.]] * 장준하 본인에 의하면 입대하기 전 아내와 몇 마디 얘기를 나눴는데 그때 "편지 속에 '돌베개'라는 말이 있거든 탈출한 줄 알라"라고 했고 실제로 탈출한 후 아내에게 편지를 보낼 때 '돌베개'라는 단어를 썼다고 한다.[* 팟캐스트 방송 [[그것은 알기 싫다]] 1회의 방송에서는 [[성경]]의 특정 구절이라는 얘기도 있으며 장준하 선생은 자서전 <돌베개>에서 편지 말미에 "성경 구절이 있으면 내가 탈출한 줄 알라"고 입대 전에 아내에게 얘기해두었다고 한다. 성경을 살펴보면, [[창세기]]에 [[야곱]]이 형에서의 장자권을 빼앗아 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피하고자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피하던 중 광야에서 돌을 베고 자다가 꿈에 하나님의 사닥다리를 보고 자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한편 [[강만길]]의 회고와 김준엽의 자서전 <장정>에 의하면 이 일화는 [[김준엽]]의 것이라 한다.[* 김준엽의 책에서는 형들에게 자신의 편지에 '草草'라고 쓰여 있으면 탈출에 성공한지 알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草草는 당시 일본인들이 편지 말미에 '여기까지 줄인다' 정도의 뜻으로 자주쓰는 단어이다.] 어쨌든 장준하는 스스로 자서전의 제목을 <돌베개>라고 지었으며 이 일화가 자신의 경험임을 밝히고 있다.[* 돌베개라는 말은 사실 [[이광수(소설가)|이광수]]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지었다는 설도 있다. 이광수의 작품 중에 "돌베개"가 있기는 하지만 친일 문학가인 점을 볼 때 근거없는 얘기로 보인다. 아래에서 장준하 선생이 육당 [[최남선]]을 평가한 이야기가 와전된 건 아닐런지. 다만 이와 별개로 장준하가 [[사상계]] 사장으로 있을 당시 최남선과 더불어 [[이광수(소설가)|이광수]]에 대해서도 어느정도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것은 맞았는지 1957년 최남선이 죽었을 때, 이 둘을 추모하는 <육당, 춘원의 밤>이라는 문학행사를 열기도 했다.] 어찌되었든 전자와 후자가 인과 관계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지만 선후 관계인 것만은 확실하고 후자가 장준하의 본심이라는 게 이후의 행적으로 인해 명백히 드러나는 셈이다. *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해 중국 대륙을 걸어서 6천리를 이동하던 중에 만나고 이후 함께 광복군 동지로 지냈던 훗날 고려대 총장이자 교수 [[김준엽]]과 절친한 동지였다. 이 둘은 광복군 훈련 중 외출이 허가되었을때 시내를 함께 돌아다니며 한국음식과 비슷한 중국음식을 찾아 먹으러다니는 등 붙어다녔고, OSS [[서울진공작전]]훈련 중에는 거의 친형제에 다름없는 우정을 보일정도였다. 해방 후에도 둘의 절친한 관계는 이어졌다. * 장준하는 [[이범석]]이 [[족청]]을 통해 발호하자 독립군 시절 사령관이었던 그와 인연을 끊을 정도로 청렴했지만 한편으로는 [[김원봉]]이 일본군을 탈출한 한국인 청년들을 미인계로 매수하려 한다고 비판한 바 있다.[* 이 부분에 관한 배경을 짚으면 한국광복군 내에서도 내분이 심했던 것에 비롯되었다. 한국광복군은 크게 제1지대([[김원봉]]), 제2지대([[지청천]]), 제3지대([[김학규]]) 이렇게 나뉘었는데 제1지대와 제2지대가 서로 갈등이 잦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장준하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 출신이다. 제1지대 출신 부대원과 제2지대 출신 부대원이 김원봉을 어떻게 생각하고 평가하는지 극명하게 엇갈림을 살펴볼 수 있다. 예컨대 한국광복군 제1지대에서 복무한 [[김승곤]](이후 광복회 회장 지냄)은 김원봉을 높이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3/1758616_13445.html|평가]]하는 반면 제2지대에서 복무했던 장준하는 <돌베개>에서 비판적인 견해를 나타냈다.] *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6.25 전쟁]] 당시 가족들을 여럿 잃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1950년]]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했을 때 장준하의 어머니는 인민군의 탱크를 보고 충격을 먹어 그 자리에서 실신을 하여 바로 쇼크사했다고 한다. 동생 장익하(張益河)는 [[연희대학교]] 출신의 통역장교였는데 전투복무 도중 실종되고 할아버지 장윤희 또한 이 당시 전쟁으로 고생하다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뿐만 아니라 부산에서는 어린 딸 또한 요절하기도 했다. 장준하 본인은 한강다리를 건너는데까지는 성공하지만 [[부산]]으로 피난가는데는 실패하고 인민군 치하의 [[청양군]]에서 피난생활을 하다가 [[인천상륙작전]] 이후 서울로 귀환했다가 [[1.4 후퇴]]때쯤 되어서야 부산으로 피난가는데 성공했다. 피난가는 과정에서 의사가운을 입고 약 몇가지를 들고 다니는 가짜 의사행세를 했던 덕분에 인민군의 눈초리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지독할 정도로 청렴하고 공사구분이 확실했던 탓에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고, 이는 [[국회의원]]이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장준하의 아내 김희숙 씨는 국회의원 명함에 인감만 찍혀있으면 어느정도 생활비가 충당될 수 있단 말을 듣고 남편의 명함을 찾다가 장준하로부터 명함 없으니까 찾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한 소리 들었다고 한다.] 아들 [[장호권]]씨는 [[연세대학교]]에 합격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등록금이 없어서 결국 입학을 포기해야했고[* [[장학금]]을 타기에는 성적이 모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이러한 장준하 일가의 사정을 듣고 당시 [[연세대]] 명예 총장이자 장준하와 친분이 있던 [[백낙준]]이 장호권씨를 장학생으로 임명해서 입학시켜주겠다고 했지만 장준하가 '''절대 안된다고''' 사절을 해버렸다고. 이후 1년 재수해서 [[고려대학교]]에 응시를 하지만 떨어진 바람에 친구 [[김준엽]]이 손써서 입학시켜줄 수 있다고 했지만 이마저도 장준하는 거절했다고 한다. 결국 장호권씨의 최종학력은 고졸로 남게 되었다.], 빚에 시달린 탓에 말년에는 본인이 수상했던 [[막사이사이상]] 메달까지 빚 청산하는데 내놓아야했을 정도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언제는 장준하의 아버지가 직접 장준하를 찾아와서 자신한테만큼은 [[사상계]] 잡지 한권을 공짜로 주면 안되냐고 사정했더니 대놓고 “안됩니다 아버님. 직접 돈 주고 사서 읽으세요”라고 사절한 바람에 장준하의 아버지가 섭섭해했었다고. 이때 정황상 아버지, 장석인 목사가 외부에서 아들 장준하를 만난 것 같은데, 아들 집에 가서 하루 묵고 되돌아가려고 계획했던 아버지가 "돈 주고 사서 읽으세요" 라는 말에 화가 나서 아들 집에 가지도 않고 바로 되돌아가셨다고 한다. 다만 이런 생활고의 경우 정권의 외압도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장준하 개인의 씀씀이도 한 몫 한걸로 보인다. 그나마 사상계가 잘나갔을 시절에도 벌어오는 돈을 가족들을 위한 생활비로 보태지 않고 죄다 남에게 기부해버리는 바람에 남아나는 돈이 거의 없었다는 듯. 사실 이때만 하더라도 장준하는 나름 명사로서 외부 강의나 결혼식 [[주례]][* 참고로 장준하가 결혼식 주례를 서 준 부부로는 [[한국사(교과)|한국사]] 강사 [[최태성]]의 부모님도 있다.[[https://twitter.com/bigstarsam/status/1030244539028533248?s=20&t=5ayD3sL6ncgJWhNHAm2kdw|#]]] 제의가 꽤 많이 들어오던 편이었다. 아내 김희숙 여사의 회고에 의하면 언제 한번 장준하가 큰 돈을 가져와서 가계부를 작성할 수 있을 줄 알았더니 며칠 지나자마자 바로 친구 아들의 등록금을 대줘야한다고 제멋대로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결혼식 주례를 서주면서 받은 돈도 교도소에서 만난 어려운 이웃들에게 이미 다 기부를 해버린 상태였다고. 그리고 말년에 유신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되었다가 병보석으로 석방되어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 장준하 일가의 사정을 듣고 [[서울대학교]] 사범대 학생들이 모금을 해서 치료비에 보태라고 기부를 하는가 하면 [[동아일보]]에서도 광고를 통해 모금을 해서 그 돈을 장준하에게 기부를 했으나 받은 돈을 죄다 기부해버렸다고 한다.[* 아무래도 1950~70년대 당시 시대가 시대인지라, 현재와 비교해서 아버지들이 가정에 살뜰한 분위기가 덜했고, 장준하 선생 성격상 대의와 주변 이웃에 더 신경을 쓰는 부분이 있었지만 가족에 아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일례로, 장준하는 피아노를 사달라고 조르는 어린 큰 딸한테 형편상 피아노를 사줄 수 없어 미안하게 생각했다는 기록이 있고, 주변 친지들의 끈질긴 설득과 지원으로 큰 딸 장호경씨는 아들들과 달리 [[이화여자대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야마하]] [[피아노]]가 일제라고 광고를 싣지 않을 정도의 결벽적 배일주의자면서도[* 그 배일주의가 어느정도 였냐면 아들 장호권 씨가 고등학생이었던 어느 날 아침에 당시 [[사카모토 큐]]의 히트곡 위를 보고 걷자(上を向いて歩こう)를 듣기 위해 레코드판을 켰는데 장준하 선생이 이걸 듣게 되었다. 장준하는 "아침 댓바람부터 일본말 듣게하느냐"고 소리치며 장호권의 방으로 들어와서는 레코드판을 들고 나가 그걸 집마당에 던지면서 크게 혼을 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장호권 씨는 외할머니와 함께 [[일본]] 만담으로 농담따먹기를 하다가 이를 본 장준하가 심지어 자신의 장모한테까지 집 안에서 일본어 쓰지 말라고 혼을 내버리는 바람에 장호권 씨와 장모 노선삼 여사 둘 다 깨갱했을 정도였다고.] 1956년 대표적인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을 제정하였으며 [[최남선]]을 추모하기도 했다. 1957년 12월호 《사상계》를 "육당 기념호"로 발간하며 권두언을 이렇게 썼다. 철두철미한 독립운동가인 그의 말이라 최남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관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이다. 때문에 장준하 평전의 저자 [[김삼웅]]은 이를 "장준하의 유일한 오점"이라고 비판했다.[* 사실 평전이라고 좋게 봐준거고 유일까지는 아니다. 단적으로 역시 친일 문학가인 김동인을 기리는 동인문학상도 장준하가 있던 사상계에서 처음 제정했고 [[장면]] 정권 시기 참여에 대해서도 장면은 억지로 넘어가준다고 해도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김영선(1918)|김영선]]은 일제강점기 군수까지 지낸 대표적인 친일파이기 때문에 필요에 의해서 친일파 출신에게 호의적으로 대한 것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장준하의 전매특허와 마찬가지인 [[사상계]]의 전신인 잡지 <사상>을 창간할 당시 장준하를 뒤에서 후원해준 이도 [[친일파]]이자 이 당시 [[문교부]] 장관이었던 [[백낙준]]이었다. 장준하는 이후로도 사상계를 창간할 때에도 백낙준의 지원을 받았고, 백낙준과 같이 [[박정희]] 정권에 대항하는 등 오랫동안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장준하와 비슷한 성향을 보였던 김준엽은 자신들이 만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었다면 이광수, 최남선 등에게 보인 태도 때문에 자신들도 친일파 소리를 들었을지 모른다고 했을 정도이다. 여담으로 절친이었던 [[김준엽]]의 경우 최남선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시선을 보이진 않았지만 본인이 몸담고 있었던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에 대해서는 존경심을 갖고 있기도 했다. 사실 해방 이후 교편을 잡을 때 고려대학교뿐만 아니라 [[연세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도 교수직 제의가 들어왔으나, 김성수에 대한 존경심때문에 고려대를 선택한 거라고 본인의 회고록 <장정>에서 밝혔다. 인촌 [[김성수(1891)|김성수]]의 경우 비록 친일을 했단 오점은 있으나 별개로 [[독립운동가]]들의 지원도 한 인물이기때문에 이 점은 높게 평가받아야한다고 [[김준엽]]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다.][* 오늘날 관점에서는 모순이 아니냐고 비판받을 수 있으나, 저 당시 우리나라는 지금 같은 수출 강국이 아니라 해외 원조로 살아가는 나라였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제품의 광고를 싣는다는 것은 일본의 자본을 받아 잡지를 펴내는 셈이 되니, 진정성을 흠 잡는 사람들이 나올 수도 있다. 즉, 중국의 [[일대일로]]처럼 일본 자본이 우리나라를 길들이려 한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사람도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국내 친일파들의 경우, 그래도 흑화하기 전에는 우리말 문학 활동을 활성화했다는 공이 있었고, 이들이 가진 자본은 그래도 국내 자본이므로, 적어도 일본 자본에 의존했다는 시비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자본가 개인의 도덕성만을 따진다면 국내 친일파보다는 야마하 창업주가 훨씬 깨끗하니, 오늘날에 장준하 정신을 내세워 이런 태도를 고집하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한때 [[최남선|선생]]의 지조에 대한 세간의 오해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의 본의가 어디까지나 이 민족의 운명과 이 나라 문화의 소장에 있었음은 오늘날 이미 사실로서 밝혀진 바요, 항간에 떠도는 요동부녀(妖童浮女)들의 억설과는 전면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赦)하는 법이 없고 인재를 자기 눈동자 같이 아낄 줄 모르고 사물을 널리 생각하지 못하는 옳지 못한 풍조 때문에 우리는 해방된 후에도 선생에게 영광을 돌린 일이 없고 그 노고를 치하한 일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욕된 일이 적지 아니하였다. 이것은 실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 1967년 5월 8일에 장준하는 대통령 선거법 위반으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되었으나, 1967년 6월 8일에 실시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 동대문구 을 지역구에 옥중출마하여 당선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당시 득표수는 57,119표, 2위 후보인 [[강상욱]]은 35,386표로 2만2천여표차. * 죽기 직전 마치 직감이라도 한 듯이 아내의 평생 소원이었던 [[가톨릭]]식 결혼([[혼인성사]])을 올렸다고 한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은 영결[[미사]]에서 '''"장준하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이라고 했다. * 장준하의 죽음 당시 3군단장이었던 [[김재규]]가 생전에 장준하를 존경하여 그가 사망한 뒤에도 암암리에 가족을 도왔다고 한다. [[이부영]]의 증언에 의하면, 장준하의 의문사 이후 유가족들이 가난한 살림에 작은 사글세방을 전전하고 있을 때, 이부영 등의 재야 인사들이 유가족에게 조그만 아파트라도 마련해 주기 위해 뜻을 모아서 [[함석헌]] 선생을 비롯한 여러 문인 및 예술가들에게 부탁하여 서화전을 열었는데, 정작 글씨와 그림을 팔아서 마련된 돈이 너무나 부족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누가 와서 남들이 안 사가는 그림들만 골라 2천만 원에 사갔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중앙정보부장]]에 취임한 김재규가 중정의 부하를 시켜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외에도 김재규는 장준하 선생의 아들 [[장호권]]에게 "자네 부친의 죽음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8081100289104003&edtNo=6&printCount=1&publishDate=1998-08-11&officeId=00028&pageNo=4&printNo=3268&publishType=00010|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음을 암시해주었다고 한다.]] 또한 [[김재규]]는 장준하가 국회의원 시절 [[국방위원회]]에 속해있을 당시에도 현역 군인으로서 자주 마주치면서 존경을 표했다고 했을 정도로, [[박정희]]하면 이부터 가는 장준하와 사이가 좋았던 몇 안되는 군부 출신 인사였다고. * [[베트남 전쟁|베트남 파병]]을 '아들들의 피로 경제를 살 수는 없다'는 이유를 들며 반대했지만 막상 파병이 결정되자 장남 장호권씨를 참전시켰다. * 해방 이후 한반도 이남에 [[미군정]]이 들어선 것과 [[베트남 전쟁]]에 국군들을 파병하는 것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것과 별개로 [[주한미국대사관]] 측 인사들과는 사이가 굉장히 좋았던 편이었다. [[문교부]] 공무원이었을 당시 [[사상계]]의 전신이었던 잡지 사상을 창간할 때 주한미국공보원으로부터 지원을 받았고, 훗날 사상계를 창간하고나서도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잡지)|라이프]]와 [[타임지]]의 한국 내 판권을 독점하기도 했으며, [[5.16 군사정변]]에 대해 호의적이었을 당시 장준하 본인이 직접 파티를 주최해서 군부 세력들에게 주한미국대사관 측 외교관들을 소개시켜주기도 했다.[* 다만 [[박정희]]는 이때부터 사상계에 대해 탐탁치 않게 생각했던 탓에 이 파티에 박정희는 참석하지 않고 쿠데타 세력 중에서는 [[장도영]]이 참석했다. 나중에 장준하가 [[주한미국대사관]]과 함께 주최한 파티에 참석한 게 빌미가 되어 장도영은 얼마 안 가 숙청당해버리고, 장준하 또한 장도영과 한통속으로 엮이는 등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말년에는 [[10월 유신]]때문에 긴급조치 1호로 구속되자 [[주한미국대사관]] 측에서 [[박정희]]에게 장준하를 석방시키라고 압력을 넣기도 하였고, 심지어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는 제목의 책을 장준하에게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한다. * 정치적 행보는 달랐지만 [[베트남 전쟁/한국군|주월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장군도 상당히 높게 평가하였다. [[베트남 전쟁/한국군|파월 장병]] 처우 개선에 관심을 가진 몇 안되는 국회의원 중 한 명이 장준하였기 때문. 이 당시 장준하는 국회의원들이 기피하다시피했던 [[국방위원회]]소속 국회의원[* 이 당시 장준하와 함께 같은 [[신민당(1967년)|신민당]] 소속 국회의원으로 국방위에 속해있던 사람으로는 '''오성장군 [[김홍일(군인)|김홍일]]'''이 있다.]으로서 군 관련 문제에 관심이 많았었다고 한다. 게다가 7대 국회의 거의 몇 안되는 [[한국광복군]]출신 국회의원이라 군부 인사들이 예의를 엄청 차리기도 했다고 한다. * [[정준하]]와 착각하지 말도록 하자. 정준하를 폄하하는 뜻이라기 보다는, 정준하의 직업이 [[개그맨]]이라서 고인이 희화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그러나 [[장학퀴즈]]에서 답이 '장준하'인 문제를 낼 때, 정준하가 그 문제를 내는 영상을 찍어서 문제를 낸 적도 있다. 또한 [[무한도전]]에서 초창기에 방영된 '아이스원정대 특집'에서 온천에서 수중 두더지 게임을 하는데 [[박명수]]가 [[정준하]]에게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아부를 떨어야 되는 상황에서 "장준하 선생같이 훌륭하다"며 [[개드립]]을 친 적이 있다.[[https://youtu.be/kvfsFSf1yAM?t=411|#]] 이때 정준하는 박명수가 성도 틀린 데다가 [[고인드립]]을 쳤다면서 오히려 가까운 자리에 지정하였다.[* 독립투사 '''정준하'''라고 잘못말해버린 바람에 오히려 정준하가 짜증을 내면서 “장준하 어르신이시지… 왜 어르신 성을 바꾸고 그래”라고 말한다. 그러자 결국 박명수는 어쨌든 장준하처럼 그만큼 의리가 있다고 말하려고 한 거라고 해명을 하지만 성질을 부린 탓에 정준하 눈 밖에 제대로 나버린다.] * 민간요법을 구사하는 치료사 구당 [[김남수]] 문제로 방송국에서의 장준하의 아들과 통화했는데, 장준하는 디스크는 없고 대신에 협심증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김남수가 평소 장준하를 치료하였다며 홍보하고 다니는 것에 대하여, 불쾌감을 느끼며 완강하게 부인하였다. * [[강원용]][* 장준하와 같은 종파인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목사이자 사회활동가였다.]은 그가 존경받아 마땅하나, 사상계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그 '정치적인 목적'이란, 대통령 당선 등 입신양명 하려는 야망을 돌려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오랜 동료 중 한 명이었던 [[서영훈]]의 회고에 의하면 장준하는 종종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본인 입으로 말하는가 하면,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선물로 준 대통령이 되는 길이라는 책을 병원에 입원했을 당시 자주 읽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박정희]]의 제3공화국이 들어서자 장준하가 정치적인 목적을 박정희에 반대하는 것으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장준하가 '[[김구]]한테 붙었다가 [[장면]]한테 붙었다가, 또 [[윤보선]]을 따라다니며 색깔논쟁에 열 올렸다'는 비판도 있다. *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타살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하여 [[시뮬레이션]]을 통해 사망 원인이 추락사가 아닐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했으나 진상 규명 불능으로 최종 발표했다. 그러나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04/07/16/200407160500067/200407160500067_1.html|2004년 보도된 주간동아 기사]]를 보면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이러한 최종 결론에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었다는 의문을 제기했는데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에서 실험을 주도한 [[홍익대학교]] 교수의 말이 나온다. 고인의 유족들은 수사 방식이나 성과에 대해 회의를 느꼈고[* 당시 유족들은 [[국군기무사령부]] 등을 전부 조사할 수 있도록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전권을 가지고 수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조사들은 전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에 유족들은 조사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일부러 관을 꺼내 유골을 검시해야 한다는 점에 부담을 느끼기도 하여 그 동안은 모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들(1993, 2002, 2004)에 응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앞선 조사들은 유골의 검시도 이루어지지 않았던 등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었던 조사들이었다. * 2012년 8월 15일 [[천주교]] 공동묘지에서 [[경기도]] [[파주시]]에 조성될 장준하 공원으로 묘지를 이장하는 김에[* 원래 이장하려 했던 것은 아니고 [[홍수]]에 의해 묘가 파손되어 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파주시가 유해를 모시겠다 하여 장준하 공원이 조성되기로 한 것이다.] 드디어 사망 후 처음으로 유골을 검시하였는데 그 결과 머리뼈에 직경 6cm짜리 동글동글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것만으로는 타살 여부를 밝히기 힘드나 다른 신체 부위에서 추락시 발견되는 골절이 1군데도 발견되지 않아 타살일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를 토대로 유족인 장남 [[장호권]][* 아버지 사후 정체 불명 4인조의 피습을 받아 턱 골절상을 입은 후 야반도주하다시피 외국으로 나갔다고 한다.]은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였으며 정부가 진상 조사에 나서지 않을 경우 직접 과학적 분석을 의뢰할 것임을 밝혔다. 검시의 자세한 내용과 유족의 주장은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547287.html|여기]]를 참조할 것. [[나는 꼼수다]] 봉주 19회에 장남인 장호권 씨와 당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 고상만 씨가 출연해 언론에 알려진 것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말하기도 했다. * 2012년 9월 1일 [[그것이 알고싶다]] 팀에서 지난 1993년 방송분에 법의학적 과학적 해석을 추가한 내용을 방송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추락사 혹은 타살이라는 2가지 가설이 대립 중이다. * 다만 이 극단적으로 갈리는 2가지 가설 중에서 접점을 이루는 것은, 계곡에서 떨어졌을 때 당시 이미 장준하는 기절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보통 사람이 추락할 경우, 무의식적으로 자기 보호본능 때문에 팔등이 땅에 먼저 닿는 식이라, 이런 부위에 골절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장준하의 시신에선 이런 골절이 발견되지 않았다.] * 사고 당시 현장을 찾아간 검사가 본 군인들은 누구인가?[* 장준하 사망 다음날에 박정희가 '''"보안사령관을 독대했다"'''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바 있다.] * 장준하 사망 당시 오간 군 내부 전보들의 내용은 무엇인가? * 2013년 3월 26일 장준하 선생 사인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정밀감식 후 이정빈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의 조사결과를 발표하였다.[[http://news.donga.com/Main/3/all/20130327/53997907/1|이정빈 교수는 유골 감식 결과 다음을 근거로 '타살 후 추락'으로 결론]]을 내렸다. 머리를 가격당해 즉사한 후 추락해 엉덩이뼈를 손상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결론은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01&aid=0006167633|이정빈 교수의 개인적인 조사 결과]]라는 것.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9371&CMPT_CD=P0000|대한법의학회]]에서는 이러한 이정빈 교수의 조사 결과에 대해 타살 후 추락이 아닌 실족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며 직접 반박까지 하기도 하였다. [[파일:attachment/장준하/53997890.jpg]] * 2012년 [[의사]] 출신인 [[정의화]] 전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은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고 주장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프레시안, 2012년 9월 12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2/0001986295?sid=102|새누리 정의화 "장준하 선생 두개골이 타살이라 외친다"]]] 정 전 국회의장은 [[보수]] 진영 소속 중진 국회의원인 데다가 머리뼈 외상을 전문적으로 치료하는 [[신경외과]] [[전문의]] 출신이라 더욱 임팩트가 컸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자신만큼 많이 머리뼈 외상 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없다고 자부하며 장준하의 머리뼈를 본 순간 타살임을 확신했다고 한다. 이후 2014년에 다시금 장준하의 죽음이 타살이라는 주장을 확고히 하였다.[* 미디어오늘, 2014년 8월 21일,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6/0000070927?sid=100|정의화 "장준하 선생 유골 이장 전 '타살'임을 알았다"]]] * 2013년 1월 24일,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124112319749&RIGHT_REPLY=R6|긴급조치를 위반한 것이 무죄 판결을 받았다.]] 또한 2013년 3월 21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180582|긴급조치가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 문재인 대통령은 장준하와 [[김원봉]]을 존경하나, 정작 장준하는 김원봉을 상당히 싫어했다. 장준하는 '김약산은 그의 독자적인 세력을 확장 구축해보려고 공작을 했다', '김원봉은 판에 박힌 공산분자'라고 혹평한 바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6/08/2019060800052.html|#]][* 김원봉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김원봉이 미인계를 써서 광복군들을 매수하려고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는데, [[김준엽]]의 회고록 <장정>에 따르면 아직 연애경험이 없었던 김준엽은 [[김두봉]]의 딸과 눈이 마주쳐 나름 호감을 갖고 몇 번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가 친구인 장준하로부터 저건 분명 김원봉 세력이 우리한테 미인계를 쓰는 거니까 조심하라고 한소리 들었다고 한다. 정작 당사자인 김준엽은 김두봉의 딸이 자기한테 미인계를 쓴 거 같지는 않다고 판단한 듯 하지만 그 후 김준엽은 [[김구]]의 최측근이자 [[장제스]] 밑에서도 일해 본 [[민필호]]의 딸 민영주와 결혼하였다. 다만 장준하가 김원봉을 싫어했던 사실과 별개로 장준하의 장남 장호권 씨가 이끄는 장준하기념사업회는 김원봉의 독립운동에 대해 높게 평가하면서 종종 김원봉 기념행사에도 참여하고 있다. 자서전 <돌배게>에 따르면 [[충칭]]에 도착하기 전 잠시 [[후베이성]] 라오허커우 시에 있던 김원봉이 이끌던 광복군 제1지대에서 신세를 지는 과정에서 1지대와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한다. 처음 도착했을 땐 같은 한국인으로서 환영받으면서 조만간 충칭으로 향하는 비행기까지 마련해주겠다는 말까지 들었지만 어느샌가부터 말을 싹 바꾸고 임정에 가지 말고 우리 밑에서 일하라는 식으로 종용을 받았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이간질 공작까지 당해 같이 인솔했던 학병 동료들과도 갈등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누구보다 충칭으로 가고자 하는 마음이 확고했던 장준하와 김준엽은 광복군 제1지대와의 협상은 포기하고 직접 [[리쭝런]]이 사령관으로 있던 [[중화민국|중국]] [[국민혁명군]] 제5전구 사령부에 찾아가서 여정에 필요한 여비들과 동복을 얻어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악으로 깡으로 버티면서]] 험준한 파촉령을 2주동안 넘으면서 충칭으로 향했다.] * 2020년 5월 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20부(재판장 김형석)는 장준하의 자녀 5명이 대한민국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 소송에서 “국가가 총 7억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사건번호: 서울중앙지방법원 2013가합540797) 또한 재심으로 무죄 선고를 받았다.(서울중앙지방법원 2009재고합22) 이 사건을 수임한 변호사에 대한 기소유예 처분도 [[헌법재판소]]에서 취소되었다.[[https://casenote.kr/%ED%97%8C%EB%B2%95%EC%9E%AC%ED%8C%90%EC%86%8C/2015%ED%97%8C%EB%A7%88880|헌법재판소 2016. 12. 29. 선고 2015헌마880 결정]] * 2020년 7월 6일 장준하의 유족에게 7억 8천만원을 배상하라고 한 1심 판결에 대해 피고인인 '정부'가 항소했다. 정부 측의 항소 근거는 "기존 대법원 판례에 반한다"는 것. 그러나 [[긴급조치]]는 [[유신 정권]] 당시 국가가 반헌법적, 반인권적으로 국민 개개인을 탄압한 조치였다는 점에서, 이에 대해 배상할 수 없다며 항소한 정부의 조치에 대해 누리꾼들은 상당히 어이없다는 반응이다. 더군다나 장준하 신원에 적극적인 문재인 정부에서 벌어진 일이라 더욱 아이러니하다는 반응이다. [[http://omn.kr/1ohic|문재인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이후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관련 판례가 바뀐 뒤 2심도 국가의 항소를 기각하고 1심과 마찬가지로 "유족들에게 7억 8000여만 원을 배상하라"고 판결했다.(사건번호: 서울고등법원 2020나2016394) 이후 [[법무부]]는 상고를 포기했다. [[https://www.moj.go.kr/moj/221/subview.do?enc=Zm5jdDF8QEB8JTJGYmJzJTJGbW9qJTJGMTgyJTJGNTY0NDQyJTJGYXJ0Y2xWaWV3LmRvJTNGcGFzc3dvcmQlM0QlMjZyZ3NCZ25kZVN0ciUzRCUyNmJic0NsU2VxJTNEJTI2cmdzRW5kZGVTdHIlM0QlMjZpc1ZpZXdNaW5lJTNEZmFsc2UlMjZwYWdlJTNEMSUyNmJic09wZW5XcmRTZXElM0QlMjZzcmNoQ29sdW1uJTNEJTI2c3JjaFdyZCUzRCUyNg%3D%3D|법무부 보도자료]], [[https://viewer.moj.go.kr/skin/doc.html?rs=/result/bbs/182&fn=temp_1667372000009100|문서뷰어]]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