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준하 (문단 편집) == 타살 의혹 == [include(틀:사건사고)] [[https://www.google.com/search?q=%EC%9E%A5%EC%A4%80%ED%95%98+%EB%91%90%EA%B0%9C%EA%B3%A8&oq=%EC%9E%A5%EC%A4%80%ED%95%98+%EB%91%90%EA%B0%9C%EA%B3%A8&ie=UTF-8|2013 장준하 두개골 부검 검색 결과]] 당시 정권이 장준하를 암살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당시 정권이 고인이 계획했던 '유신개헌운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고인을 살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신개헌운동'의 실체에 대해서는 이미 고인이 된 [[법정(승려)|법정]]과 [[김대중]]이 증언했다. [[http://player.youku.com/player.php/sid/XMzM4NTM5OTY4/v.swf|KBS 인물현대사.E27.장준하 2부-거사와 죽음의 진실(57:26) 동영상]] 1993년 3월 결성된 민주당의 '장준하 선생 사인 규명 진상 조사 위원회'는 장준하의 사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을 제기하였다. * 추락 지점이 경사 75도의 가파른 암벽이어서 장비 없이는 내려갈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이 발견된 암벽은 경사도를 볼 때 굴러떨어지는 물체가 멈출 수 없는 곳이다. * 시신에는 외상이나 골절이 전혀 없고, 휴대한 보온병[* 지금 생각하면 납득이 안 갈지도 모르는데, 당시 보온병 하면 당연히 단열재가 '''유리'''였다. 높이 30cm 정도에서도 땅에 떨어지면 단열재인 유리가 깨지고, 그러면 그 보온병 버려야 했다.]과 안경이 깨지지 않았다. * 당시 시신을 검안한 [[조철구]]에 따르면, 오른쪽 귀 뒤에 가로 세로 2cm 가량의 흉기로 찍힌 자국이 있고, 또 팔과 엉덩이에 치료 목적이라고 볼 수 없는 주사바늘 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 어깨 안쪽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어깨를 붙들려 억지로 끌려간 듯한 흔적으로 보인다.] * [[문국진]] 박사의 법의학적 소견에 따르면, 우측 귀의 함몰된 작은 상처가 인공적인 물체를 가지고 직각으로 충격을 가해서 생긴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당시 두개골을 직접 검시한 서울대법의학연구소 이윤성교수의 소견서는 "이 손상이 뭔가에 맞아 생긴 것인지 또는 넘어지거나 추락하면서 부딪쳐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였다. * 사고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의 증언이 명확하지 않다. 증언을 계속적으로 번복하였다. * 김용환은 1967년에 장준하가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을 때에 장준하 선거캠프의 자원봉사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1971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장준하가 낙선하자 사라졌다고 한다. 그러나 묘하게도 1975년 8월 17일 장준하가 등산하는 날에 홀연히 나타나 동행하고선 그대로 목격자가 된 것이다.그러나 김영삼의 상도동계나 김대중의 동교동계 처럼 그당시엔 유력 인들 주변지인들의 모임,가신단이 자연스럽게 형성되있었다. 김용환이 거기에 있음을 추측할수 있다. * 1993년 민주당에서 [[한광옥]] 최고위원을 위원장으로 장준하 선생 사인규명 진상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8월 20일 2차 답사때 당시 유일한 목격자인 김용환과 함께 사고 현장을 답사하였는데 김용환은 산행입구를 찾지 못했고, 산악회 일행이 점심 먹었던 장소도 찾지 못했으며, 뛰어넘었다는 2개의 능선과 계곡도 없었고 계곡으로 내려가는 하산길도 찾지 못했으며 지금까지 추락했다고 알려진 14m 70cm 지점이 아닌 엉뚱하게도 훨씬 높은 75m 지점에서 추락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당시 의정부지청 검사였던 서돈양은 김용환이 장준하 선생의 시계를 차고 있어서 머리를 쥐어박았다고 진술했다.그러나 18년 동안 계곡 지형이 변하거나 산길도 변할수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못찾을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771393&CMPT_CD=P0000|의문사 진상규명위원회의 조사관 중 한 명이었던 고상만 씨가 오마이뉴스에 기고한 글]]에 의하면 사건 당일에 장준하의 가족에게 '''장준하의 사고소식을 알린 전화'''가 걸려왔는데 중정문서를 확인해본 결과 '''김용환이 걸었다.'''라고 적혀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 그 일대에서 전화라곤 행정용 전화인 마을 이장의 전화 밖에 없었다는 것. 마을 이장은 자신의 전화가 행정용 전화였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빌려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김용환의 행적이 이래저래 수상하다는 점도 의혹을 키우고 있다고 한다. 정리하면 모든 정황을 따져봤을 때 장 선생의 죽음 30분 전과 12시간 후의 이 사람의 행적이 불명이다. * 고상만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과 관련된 엄청난 양의 조사기록물이 국가기록원에 있는데 '''약 70년간''' 그러니까 '''2074년까지 비공개로 처리되었다.''' 국가기밀이라도 30년 후면 해금된다는 점을 봤을 때, 여러모로 74년까지 의혹을 늘릴 생각이라는 무리수로밖에 안 보인다.국가기록원기밀문서는 최장 30년이다. * 이 사건과 관련된 사람들은 현재 한결같이 사건의 진상에 대해 "지금은 말할 수 없다."며 침묵을 지키고 있다. * 몇몇 문제제기를 한 프로그램, 심지어 종편방송인 JTBC에서도 김용환을 찾아가서 취재를 요청했으나, "기존의 내 설명대로라면 문제제기 된 부분은 모두 해소된다"고 발언하며 추가적인 인터뷰는 거부[* 김용환은 추가적인 인터뷰와 수기를 월간조선에서 한 적은 있다. 다만 이 때는 가명으로 처리되었다. 다만, 그것이 알고 싶다 1993년 방송 마지막에 나오는 의미심장한 발언은 방송국에서 임의 편집했다는 판결이 나왔다.]한 채 [[http://www.newsm.com/news/articleView.html?idxno=7755|2017년 9월 20일 사망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