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공포정치 ==== [[남의사]], [[CC단]] 등이 기존의 통설마냥 중국판 [[게슈타포]]같은 존재는 아니였지만, 그렇다고 한들 그런 [[친위대]] 성향의 단체들이 벌인 행각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장제스는 [[반공]]의 기치 아래 자신에게 반대하는 대중, 지식인, 예술가들을 억압하고 통제하려 했던 것은 분명하며, 소위 반체제 인사라 칭해지는 인물들에 대한 [[고문]]과 [[폭력]] 등 반인륜적 행위가 자행되었던 것 또한 장제스 정권의 한계라고 볼 수 있다. 덕분에 자신의 스승인 [[쑨원]]의 [[삼민주의]]를 계승한다면서도 정작 국부천대 이후 죽는 날까지 '''[[대만 계엄령|계엄령]]을 수십년간 펼쳐'''[* 계엄령은 국부천대가 이루어진 1949년부터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의 집권기간 중인 1987년까지 38년간 이루어졌으며, 장제스는 26년차인 1975년에 사망했다.] 실제론 쑨원이 추구한 삼민주의와 반대되는 행보를 걸었다. 이 동안 민주화 인사들을 향해 각종 [[백색테러]](白色恐怖)가 벌어졌으며, 계엄 통치하에 3당 훈정을 표방해 청년당, 민주사회당 같은 관제 야당을 제외한 야당은 사실상 불인정되었다.[* 박정희는 미국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탄압은 했을지언정 신민당 자체를 금지시키지는 않았다.]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대만 계엄령)] 끝까지 본성인을 차별하고 핍박하여 '''사실상의 식민통치자로서''' 정국을 이끌어나가며 반공보다 과격한 중화 민족주의를 더 중시하여 본성인의 정체성과 관련된 의사는 철저히 무시와 탄압으로 일관하면서 민주화 이후 대만 정치 양극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오죽하면 많은 본성인들과 민주화 인사들이 장제스의 국민당 통치시기보다 [[대만일치시기]]를 더 높게 평가할 정도.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