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마오쩌둥보단 유순했던 통치 ==== 장제스는 독재자였다. 하지만 그것이 [[국공내전]] 패배의 원인이 되었다는 설명은 맞지 않다. 마오쩌둥 역시 독재자였다. 장제스는 [[후한민]], [[왕징웨이]] 등과 합작의 방식을 추구했고 반란을 도모했던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 바이충시 등은 국공내전이 끝나기 직전까지도 완전히 축출하지 못했으며 특히 북벌 완료 직후부터 반장 운동을 한 리쭝런은 부총통에 선출되기까지 이르었다. [[루쉰]], [[라오서]] 등의 좌익 문필가, 지식인들은 장제스 정권 시절부터 비판을 쏟아냈지만 그들 대부분은 실질적인 처분을 받지 않았으며 [[덩옌다]]의 불법적인 처형만이 결국 장제스를 비판할 몇 안되는 수단에 불과했다. 장제스에 대한 수많은 비난은 '그래도 되는' 사회 분위기 덕이었다. 한편 대중에 대한 장제스의 지지 역시 확고한 편이었으며, 항일의 영도자로서 지위는 절대적이었다. [[중일전쟁]] 터지고 일본군 점령 당시의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에서 다들 뛰쳐나와서 외친 구호는 '장제스 위원장 만세'였다. 국민당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1950년대까지도 유지되어서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장제스가 돌아온다는 소문이 여기저기서 돌면서 이에 호응하는 봉기를 유도하기도 했다. 예컨대 [[6.25 전쟁]] 중에 장제스가 미군과 호응하여 [[하이난]]을 점령하고 [[린뱌오]]를 죽였다는 소문이 퍼져서 중국 전체가 요동쳤고 만주 지역에서 공산당기 소각, 마오쩌둥 초상화 파괴 등의 반공 시위와 봉기가 일어났다.[* 물론 여기엔 공산당의 상상을 초월하는 막장 경제 정책과 공포독재가 배후에 있었지만. 그러나 다른 의미로는 장제스 시대가 마오쩌둥 시대보다도 더욱 좋았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물론 공산당이 중국을 완전히 통제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