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중국]]의 평가 == >"장제스는 자신의 신념에 투철한 용기있는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다." >---- > - [[마오쩌둥]] 장제스와 적대했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당연히 악평 천국이었다. [[1975년]] 장제스가 타계했을 때, 중국 관영 통신사인 신화사에서는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면서 장제스의 이름 앞에 "[[중국 국민당|국민당]] 반동파의 [[두목]]이자 중국 인민의 공적(国民党反动派的头子、中国人民的公敌)"이라는 수식어를 갖다 붙였으며, 대륙에서 만들어진 창작물들에선 대부분 [[악역]]으로 나온다. 물론 공산당 인사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지 민간에서는 난징 10년의 번영을 기억한 탓인지 [[대약진 운동]]의 처참한 실패로 민생이 나락까지 떨어진 1950년대엔 장제스 정권이 나았다는 불만의 목소리들이 터져나와서 기겁한 마오쩌둥이 [[반우파 투쟁]]을 벌여 지식인들을 때려잡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도 아닌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은 외국인들에게 난징 시절의 경제적, 문화적 풍요로움에 대한 향수를 떠들어 주위를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다. 만약 일반 인민이 그딴 소리했다간 홍위병에게 조리돌림당하고 맞아 죽을 발언들이었으니... 그래도 중국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니만큼 알게 모르게 야심만만하고 비범한 기질을 지닌 당대의 호걸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으며, 다소 아이러니하긴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과 대만의 국력 차이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지고 나서는 역으로 장제스 재평가에 중공 정부로서도 큰 부담이 없어져서 지금에서는 [[중국 공산당|공산당]] 역시 장제스를 재평가하고 있다. 예전에는 공산당의 정적이었던 장제스를 보았다면, 현재는 중국사의 정통성을 가진 정권의 입장에서 일본에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항전했던 장제스를 높이 평가하게 된 것이다. 비단 장제스 뿐만 아니라 [[중국 국민당|국민당]]에 대한 평가가 역시 후한 편인데, 최근 중국의 역사 교과서는 국정제에서 검정제로 바뀌면서 중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중일 전쟁 단원을 가르칠 때 '''국민당 정권이 항일에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기술하고 있고, 과거 중국의 영화에서는 중일 전쟁에서 [[팔로군]]을 위시한 공산당의 역할만 강조되었다면 2010년에 나온 영화 첩혈고성이나 2011년에 개봉한 [[진링의 13소녀]]에선 용맹했던 국민당군의 [[중일전쟁]] 때의 활약도 조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들이 남한과 북한 사이의 긴장감에 극에 달하던 시절에는 [[금지어]] 취급을 받다가 남북간 차이가 넘사벽으로 벌어진 지금에서야 재평가되는 모습과 흡사하다. 물론 김일성, 박헌영 같은 일부 인사는 여전히 욕만 먹지만 이는 6.25 전쟁을 일으켰다는 문제로 인해서이다. 다른 사회주의 인사들은 비중은 작지만 독립운동 행적이 역사 교과서에 기술하고 있다.] 사실 장제스 집권기 동안 중국 국민당이 권력을 독점하고 야당은 관제야당만 허용되는 등 대만이 정치제도로 본다면 중국과 크게 다를바없이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먼 국가였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중국내 고위인사들이나 경제전문가들이 개혁개방 이후로 경제정책을 짜면서[* 물론 1980년대 후반 이후로 대만도 민주화 되었지만 개혁개방 시작 시점에서는 대만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일당독재국가였으니까.] 대만과 싱가포르의 경제정책을 많이 참고했다.[* 물론 환경의 차이는 있기 때문에 그대로 본뜬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도 지역별로 다른 경제모델이 적용되고 있는것도 이 때문이고.] 사실 이런점에서 보았을 때 21세기 중국은 마오쩌둥이 꿈꾸던 중국보다는 오히려 장제스가 꿈꾸던 중국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평할 수 있다. [[국부천대]] 전 수도였던 [[난징]]에는 지금도 국민당 총통부가 보존되어 있고 장제스의 집무실도 장제스의 초상화와 청천백일기와 함께 멀끔히 전시되어 있다. [[난징 총통부]] 문서 참고. 2차 대전 이후 중국군이 일본군의 항복을 받았던 후난성 즈장 항일 전쟁 기념관에서는 항일 전쟁 영웅으로 장제스의 사진과 청천백일기가 그럴듯하게 전시되고 있다. 덤으로 미국인이 주축이 되었던 [[플라잉 타이거즈]] 기념물도 있다. 중국(대륙)인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인물이라며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많아졌고 절강성 영보시에 있는 그의 생가도 깔끔하게 정돈되어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물론 복원된 것이다. 원판은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에게 개박살났다.] 사실 마오쩌둥에 맞섰던 인물이기에, 그를 높이면 그를 이겼던 마오쩌둥이 더 부각되는 효과도 있고. 장제스 평전의 저자인 조너선 펜비가 중국을 방문하여 장제스 생가의 안내인에게 장제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대학원생이라던 안내인은 "많은 실수를 저질렀던 중대한 사람"라고 대답하더니 머뭇거리다가 "마오 주석처럼요."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오늘날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고려해보면 얼마나 장제스에 대한 전향적인 평가인지 생각해볼 만한 일화이다. 인터넷으로 가면 더 과격해져서 아예 공산당이나 마오쩌둥을 부정하고 장제스가 훨씬 나았다는 의견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중공이 장개석에 대해 전향적인 재평가를 하고 있다 해도 현실에서 대놓고 저렇게 말하고 다녔다간 당연히 [[코렁탕|코로 마라탕을 먹게된다.]] 한편 장제스가 재평가되는 데에는 대만의 [[범록연맹]]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존재한다. 90년대 이전에는 중화인민공화국이나 중화민국이나 [[하나의 중국]]에는 동의했지만, 90년대 이후 중화민국이 민주화되고 대만에서 중국으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민주진보당]] 등의 범록 연맹이 유력 정치 세력으로 급부상하게 되었는데 이는 중국 입장에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2000년대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 공산당]]이 그토록 적대해왔던 [[중국 국민당]]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지금의 국민당에서 여전히 존경받는 인물인 장제스를 중국 대륙에서도 재평가함으로써 [[하나의 중국]]에 반대하는 범록연맹을 현재의 중국 국민당과 함께 견제하는 효과를 가지는 것이다. 사실 중국사에서는 새 왕조가 집권하면 전임 왕조에 대한 평가는 매우 박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제대로 된 평가를 받아왔다. 이는 장개석 또한 마찬가지로 [[장제스의 북벌|자신의 북벌]]로 전복된 [[북양정부]]의 수장들에게 나중에 여러가지 직위를 추증하거나 수여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중국 역시 현임 정권에 대한 불만 때문에 전임 정권에 향수를 품는 경향이 있는데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