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중일전쟁]] === >"[[2차 세계 대전]] 이후 수십년간 장제스는 20세기 역사에서 대단히 무능했던 사람이라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리고 이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그를 좀 더 호의적인 시각으로 볼 이유가 있다. [[이오시프 스탈린/평가#s-3|엄청난 악조건 속에서 나라를 밝은 미래로 이끌기 위해 분투한 유능한 지도자로 말이다. 최근의 전기 작가들, 특히 전직 미국 외교관 제이 테일러 같은 사람들은 장제스의 결점보다는 그의 훌륭한 자질을 강조하고 그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환경, 특히 재앙에 가까운 일본의 침략 직후에 분투했던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각각 레닌과 쑨원의 뒤를 이은 스탈린과 장제스는 비슷한 시기에 집권하여 경제 개발의 초석을 닦았고, 중일전쟁에서 장제스는 중국에서 스탈린과 같이 나라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으며 승리하여 각각 자신들이 통치하는 [[소련|나]][[중화민국/국민정부|라]]를 유엔 상임이사국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당대에는 욕을 먹고 격하되었을지언정 결국은 역사에 의해 재평가를 어느정도 받게 된다.][* 단 차이점이 있다면 스탈린의 독재는 장제스의 독재보다 훨씬 강압적이였다. 또한 장제스에 비하면 스탈린의 통치 환경이 더 조건이 좋았다. 소련 내의 스탈린의 정적들은 적었던 반면 중국 내의 장제스의 정적들은 중국공산당과 잔존 군벌 등 강력한 세력들이 남아있었다. 스탈린이 지금도 "당시에는 필요악이였지만, 두 번 다시 등장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는 극단적인 평을 받는 것에 비해 장제스는 대체로 긍정적인 평이 더 우세하다.] >---- > - 리처드 번스타인 '''[[독소전쟁]] 시기 [[소련]]에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었다면, [[중일전쟁]] 시기 [[중화민국 국민정부|중국]]에는 [[장제스]]가 있었다.''' 중일전쟁은 장제스가 눈부신 진가를 발휘한 순간이었다. 장제스의 실책은 전쟁 초반 중국군 주력을 [[상하이 전투|상하이에서 날려버린 일 정도]]에 국한되어 있고 이후에는 오히려 중국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하면서 항일 항전 의지를 불살랐다. 장제스의 라이벌이었던 왕징웨이 등이 일본에 붙어버리고 자신들의 기반을 고수하려는 이기적인 군벌들의 뒤통수에도 굴하지 않고 중국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공이었다. 우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맞서싸울 수 있는 기본적인 전투력을 마련했던 것은 독일, 소련의 도움을 받은 장제스의 군사 정책 덕분이었으며 만주를 거저 주워먹듯이 했던 일본이 상하이에서 수 만 단위의 사상자를 내며 고전했던 것도 장제스가 항전 의지를 보이고 장제스가 미리 상하이를 중심으로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했으며 자신의 권력 기반인 독일식 사단과 중앙군을 아낌없이 투입했기 때문이었다. 일본이 상하이 함락 이후 화북을 할양하는 조건으로 굴욕적인 강화 조약을 강요했을 때 주화파인 왕징웨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 강경파 군벌들까지 항복하는 수밖에 없다고 낙담했을 때도 "한 나라의 지도자가 되어 침략자에 맞서 굴복하는 것은 인민들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일"이라며 단호히 거부하고 일본에 맞서기로 결정한 것이 바로 장제스다. 상하이에서 장제스는 중국군의 주력 80만명을 날려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고 덕분에 중국 경제의 중핵인 중국 동해안과 화북, 화중을 날려야 했다. 그러나 충칭으로 정부를 옮기면서도 장제스는 중국군이 일본군에 포위 섬멸되어 털리는 일을 막아냈고 결국 충칭을 중심으로 일본군에 맞서 항전을 지휘했다. 장제스가 중일전쟁에서 저평가를 받는 데에는 공산당과 일본뿐만 아니라 스틸웰의 모함도 큰 역할을 했다. 스틸웰은 장제스가 군벌만 내세우고 공산당 토벌에만 주력했으며 물자를 쌓아놓고 방관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장제스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중국군은 밀리면서도 타이얼좡에서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며 창사에선 세차례나 일본군 공세를 격퇴했다. 우한 점령 이후에는 바로 난징 등지에 반격을 시도해서 일본군에게 큰 타격을 주기도 했다. 일본군이 충칭을 먹지 못한 이후는 중국군이 험준한 지형을 바탕으로 치열한 저항을 해서이지 중국군은 맛갔는데 일본군만 병신이라 그런 것이 아니다. 우한 점령 이후 중국 전선은 충칭, 뤄양 등지를 일본군이 찔러보고 중국군이 깊숙히 그들을 유인하여 기습하여 격퇴하는 일의 무한 반복이었다. 중일전쟁의 중국군에 해가 된 것은 장제스가 아니라 스틸웰이었다. [[창더 전투]], [[대륙타통작전]] 이전에 일본군의 공세를 눈치채고 대비를 주장한 것도 장제스였고 허약한 일본군이 반격할리 없다고 그걸 씹고 장제스의 예비대를 버마로 보내버린 것이 스틸웰이다. 스틸웰의 훼방만 아니었어도 장제스의 반격 작전은 늦어도 1944년에 시작됐다. 이후 장제스는 마침내 베이징, 난징, 톈진, 상하이 등 일본이 점령한 지역을 다시 수복하는 데 성공했고 그와 동시에 중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중국이 세계 대전에서 승리함과 동시에 [[UN]] [[상임이사국]] 진출에 한 몫 했다. 다만, 독재자들히 흔히 그렇듯이[* 가령 1940년의 스탈린이나, 유럽 전선 막바지의 히틀러처럼] 장제스 또한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이상한 판단을 내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치고 작전]]쯤 가면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장제스가 휘하 장병들에게 후퇴 없이 결사항전을 할 것을 명해서 피해를 키운 경우도 있었고 2차 국공내전에서 그의 판단은 이해가 안갈 수준이다. 자세한 내용 후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