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1930년대 초반 === 장제스는 이러한 계략을 통해 위안스카이 사후 오랫동안 분열되었던 중국을 마침내 통일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으나...장제스가 빠른 통일을 위해 썼던 방법이 그의 목을 죄게 되었다. 통일 이후 300만에서 최대 1천만에 달했던 국민당군은 대다수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등 군벌 출신의 오합지졸들이었다. [[1929년]]의 '편견 회의'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고 더불어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개최되었다. 당연히 군벌들이 반발하여 회의는 흐지부지되었고 이 반발은 반장 전쟁이라는 대규모 내전으로 번졌다. 반장 전쟁을 진압한 후에도 19로군, 천지탕, 리쭝런, 바이충시 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고 공산당의 [[대장정]] 중에도 지방 군벌들의 태업 행위가 장제스를 방해했으며 마침내는 [[시안 사건]]이라는 쿠데타까지 당했다. 이런 문제는 2차 국공 내전의 패배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펑위샹]], [[왕징웨이]] 등은 장제스를 제거하기 위해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가졌다. 광시 군벌 리쭝런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옌시산(염석산, 閻錫山)은 "산시(山西)성 [[먼로 독트린|먼로주의]]"를 선포하고 반독립 정권을 구축하기도 했다. 장제스는 이 문제를 잘 알고 있었고 북벌 이후의 편견 회의로 군벌들을 정리하려 했고 초공 작전을 구실로 군벌군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워 군벌들을 약화시켰고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지방 군벌들의 영역에 대장정 중인 마오쩌둥을 잡는다는 구실로 중앙군을 몰고 눌러앉아 지방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다. 장제스는 이렇게 자신의 권위를 강화시켰지만 이에 비례하여 군벌들은 장제스를 더욱 믿지 않게 되었고 적개심을 품게 되었단 것이다. 이는 [[시안 사건]]의 주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수백만 대군이 있다고 해서 이들이 현대식 무기로 잘 무장한 군대는 아니었고, 오히려 어제까지만 해도 비적질을 하던 도둑떼도 섞여 있고 제대로 된 무장도 못 갖춘 일이 허다했다. 중국의 공업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 이들을 잘 무장시킬 수도 없고 훈련이나 규율은 개판이었다. 장제스는 중국의 헬게이트 상황을 타개할 좋은 청사진을 내놓아왔는데 군사 분야에서도 그 능력을 발휘해 소련, 미국, 독일, 이탈리아에서 최신식 무기와 공장, 군사 고문들을 받아들여 강력한 유럽식 중앙군을 양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플라잉 타이거즈]]로 대표되는 미국의 도움으로 그럴듯한 공군을 창설하는데 성공했고 [[한스 폰 젝트]],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과 [[히틀러]]의 지원으로 독일식 중앙 사단을 양성했으며 상하이 지역에 강력한 토치카 방어선을 꾸려서 중일 전쟁 이후 2차 상하이 전투의 우쑹 상륙 작전에서 일본군을 개발살내기도 했다. 그리고 소련도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을 비롯한 뛰어난 고문을 파견하는 한편 막대한 차관과 무기를 제공하여 장제스를 도왔다.[* 사실 장제스의 상하이 쿠데타 이전까지 소련은 장제스와 국민당이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는 외국이었다.] 외국의 도움을 활용한 장제스는 강력한 군대를 양성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은 고작 2년도 못되었다. 1935년이 되어서야 장제스는 군비를 증강할 수 있었는데 일본은 1937년에 쳐들어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