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평가 (문단 편집) === 한계 === >장제스가 어두컴컴한 사무실에서 나를 맞았다. 그리고 귀찮다는 의사가 분명한 표정으로 중국에는 식인이 있을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개가 사람을 뜯어먹는 사진을 보여주자 다리를 떨기 시작하더니 신경질적인 경련을 일으켰다. >---- >-시어도어 화이트 분명 계획은 위대했고 성과도 엄청났으나 장제스의 능력만으로 정리하긴 상황이 너무 개막장이었고 피땀흘려 이룬 성과는 [[중일전쟁|일본]]과 [[국공내전|공산당]]이 다 날려먹었다. 소위 황금 10년이라 불리는 중화민국 번영기를 구가했던 장제스였지만 그럼에도 청나라 말기부터 내려오던 기근과 피폐한 농촌 생활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는 못했다. 사실 이건 장제스의 방법론 문제인데 국민당을 지지하는 향신과 중산층 세력들을 척지고 무리한 토지 개혁을 실시하는 것은 국민당의 기반을 크게 흔드는 일이었고, 무엇보다 장제스가 내세웠던 것이 상품 작물 재배 및 농업 기술 발전, 인프라 개발을 비롯한 온건한 방법으로 농민 소득을 확충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토지 개혁과 달리 눈에 확 보이는 정책이 아니므로 쉽게 고평가받을 수 없고 1931년의 대공황의 타격이 중화민국 전체의 상황인 것처럼 호도가 되면서 1936년 시점에서 중화민국 농촌 경제가 최고점을 찍었던 사실은 잊혀져 버렸다. 이쯤되면 재수도 더럽게 없다. 게다가 장제스가 발전시켜놓은 농촌과 도시는 일본군이 다 때려부숴버림으로 장제스와 중국인들은 국공 내전 시기에 정책의 수혜를 받지 못했다. 거기에 장제스 자신이 패배의 원인을 민생에 신경쓰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한탄하는 기록들이 발견되면서 결국 장제스는 지주와 자본가 눈치를 보면서 농민들 삶을 등한시해버린 지도자라는 비판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1980년대 이후로는 사료가 발굴되면서 재평가돼서 그런 단순한 평가는 사라지고 있다. 또한 공산당의 준동과 장제스의 전임 지도자들이 맘대로 빌려쓴 빚과 사사건건 들고 일어나는 군벌들이 방해물이 되었다. 1930년대엔 국가 수입의 70%를 채무 상환과 군사비에 쓰고 있었다. 빨리 경제 개발에 예산을 돌려도 모자랄 판에 엄청난 양의 돈이 공산당과 군벌 토벌에 들어갔으니 더 막장... 그렇다고 돈을 안 쓰면 얘들이 총 들고 장제스 잡겠다고 달려올테니 거기 돈을 쓰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리고 장제스도 인간이므로 그가 완벽한 정책만 펼쳤을 리도 없고 실책도 있다. 재정과 행정력의 부재로 중국 곳곳의 자연 재해와 기근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차치하더라도 아예 정책 실패도 있는데 경제 대공황 시절의 쿵샹시 주도의 경제 정책은 엄청난 타격을 가져왔다.[* 당대 경제적으로 중요한 시기에 중국과 미국간의 은본위 문제가 얽힌 것도 있다. 관련해서 쑹쯔원과 쿵샹시의 대립은 정책상의 문제로 시작되었다. 혹자는 [[금본위제도]]가 안정적이었다면 중국 경제가 그렇게 파탄나지 않았다고도 본다.] 중일전쟁 때 박살난 경제를 제때 수습하지 못한 것도 치명적 실책이며 이는 국공내전 패배의 단초를 가져왔다. 중일전쟁으로 장강 삼각주 일대의 경제적 기반을 상실당하면서 금은본위제가 붕괴된 마당에 재정 적자를 이유로 화폐를 마구 찍어냈는데, [[1936년]] 화폐 발행량의 100여 배를 넘는 1,890억 원을 [[1937년]]부터 [[1944년]]까지 찍어냈다. 그 바람에 일본군이 계획한 중국 법폐를 대량 위조하여 중국 내 경제 혼란을 일으키려 한 계획이 뒤집어졌다. 그리고 일본 위폐 작전 책임자는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47278200|'''중국은 실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나라다''']]라는 비아냥급의 찬사를 남겼고, 일본의 계획은 [[쇼카쿠급 항공모함]] 1척의 건조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났다. 일단 중일전쟁 시기의 인플레이션은 훗날의 비난과 달리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주요 수입원과 물자 생산 라인이 죄다 파괴되거나 적의 손에 넘어간 상황에서[* 공업력의 90% 이상 상실. 전쟁 전과 비교해서 철강 생산량 1%.] 부양해야 하는 인구는 증가해버려서[* 일본 점령지에서 황폐한 충칭으로 5천만 ~ 9천만의 피난민이 몰려들었다.], 문자 그대로 병사들 먹일 식량을 구할 수가 없어 전략 요충지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도 없을 정도로 열악해진 중화민국에서 초인플레이션은 당연히 이건 해결 불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 이 대혼란을 조기에 극복하지 못했고,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2차 내전의 포문을 열어버린 것은 결국 장제스 정권의 자살 방아쇠로 작용하고 만다. 장제스는 전쟁이 빨라도 1946년 ~ 1947년까진 계속될 것으로 생각했고 이기는 방식도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국민당군이 차례로 영토를 회복하는 것이었지 원자탄과 소련군을 콤보로 처맞은 일본이 영토를 한꺼번에 토해내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이러다보니 국민당은 피점령지의 치안과 경제 회복에 대한 계획이 전혀 없었고 결국 혼란을 야기했는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서는 행정력 복원과 경제재건이 필요했지만 장제스는 당명과제인 전후복구를 해서 지지기반을 먼저 다지는 대신 내전을 재개하는 길을 선택했다. 당초에 막강한 군사력으로 국공내전에서 우위를 차지할것으로 보였지만 중일전쟁으로 황폐화가 극심했던 중국 경제는 물가상승과 물자부족으로 파탄이 나고 말았고 이는 지지층의 이반을 불러일으켜 결국 극도로 불안정했던 국민당 천하는 와르르 무너져내리고 만다. 특히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실행한 금원권 개혁의 실패는 국공 내전에서 그의 패배를 불러온 원인 중 하나로 지적된다. 국부천대 이후 뒤늦게 장제스는 공산당을 잡겠다고 [[토지개혁]] 및 물가 문제 등 경제문제를 뒷전으로 밀어놓은 것을 후회하면서 대만에서의 경제성장에 주력했고 이는 어느정도 실효를 거두었지만, [[대만섬]] 자체가 중국 본토와 비교하면 너무도 작았기 때문에 1950년대 말 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중공의 경제침체에도 권토중래를 할 기회를 도저히 잡지못하게 된다. 그리고 국민당 정권의 부패는 심각했는데 특히 [[4대가족|장제스의 인척인 공씨, 송씨]] 등이 가장 악명이 높았다. 이들 4대 가족은 중국 공업력이 요단강 건넌 이후 중일 전쟁 수행을 위한 공업력과 자본 확충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고 이들의 세운 공도 많긴 하지만 이들이 너무도 부패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쿵샹시]]의 가문은 '양자공사'를 통해서 양쯔강을 통한 수운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했고 중일 전쟁 중에도 막대한 돈을 뿌리며 미국까지 자식들을 신혼 여행 보내는 짓으로 구설수에 올랐다.[* 이 때문에 빡친 장제스가 쿵샹시를 잘라버리고 사이 좋지 않은 처남인 [[쑹쯔원]]을 다시 재정 부장에 앉혔다.] 쑹씨 가문은 미국의 원조 물자를 빼돌려서 막대한 치부를 했다. 또 중일전쟁 이후 일본 점령지를 회수하는 과정에서 경제 안정화를 위해 실시한 화폐 개혁에 있어서 이들이 끼어들어 환율 장사를 하는 바람에 만주와 중국 동해안 지역에 막대한 빈곤을 초래하였다.[* 다만 이들의 부정부패를 국공내전의 패배의 원인을 찾느냐는 또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이들의 부패와 국민당 정권의 몰락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기 때문. 당대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로 사용된 적은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