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생애 (문단 편집) ==== 실패에서 배우다 ==== 장제스는 국공내전에서의 패배 원인을 부정부패 척결 실패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정착같은 사회정책의 부재, 3,000%대의 초인플레이션으로 나타난 물가상승 억제 실패[* 사실 장제스도 척결 의지가 확고했지만 당시 군벌과의 내전, 중일전쟁, 곧바로 국공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제대로 척결하지 못했다.]에 있다고 보면서 중국 통치시절과는 다르게 대만 시절에는 사회정책과 부패문제에 있어서 철저하게 신경쓰는 모습을 보였다.[* 반대로 마오쩌둥의 경우에는 처음에는 [[천윈]], 보이보 등의 지휘 아래에서 통화가치 안정 등 안정성장 노선을 취했지만(다만 이 부분은 [[스탈린]]이 중국의 경제정책에 관여하면서 축소시킨 영향도 있기는 했다.) 1950년대 중반 이후로는 조급증을 보이며 1950년대 초중반의 안정성장 노선을 뒤엎고 [[대약진 운동]]을 추진하다가 현실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지부조화]]에 빠져 계획의 조기수정을 거부하며 결국 3,000만명이 죽는 대참사가 일어난 것을 보면 매우 대조적이었다.] 우선 대륙 시절에는 [[부패]]가 매우 심해서 [[미국]]이 지원을 가망이 없다고 보면서 지원을 중단한데다가, [[토지개혁]]과 [[의무교육]]제도 도입이 지지부진하여 [[문맹률]]은 1949년도에 80%에 달했고 결국 중공이 문맹퇴치를 위해서 간화자 도입을 단행해야 했던 데 반해, 대만 시절에는 토지개혁을 전격적으로 시행하고 [[복지]][[예산]]과 교육예산도 어느정도 확충시키면서 이미 1963년도에 9년제 의무교육 제도를 시행했으며 고금리 정책과 [[쌀]], [[밀가루]], [[돼지고기]], [[닭고기]] 같은 기초 식료품 가격 안정조치로 물가상승률을 한자리 수로 안정화시켰고, 저축률도 늘렸으며 부정부패척결도 어느정도 단행했다.[* [[장웨이궈]]의 아내이자 장제스의 둘째 며느리인 스징이가 1953년에 [[의문사]]했는데, 스징이가 평소 사치로 인해 평판이 안 좋았기 때문에 스징이가 사망했을 때 장제스가 며느리를 부패 문제 때문에 일부러 [[자살]]시켰다는 풍문이 대만 내에서 퍼졌다. 이러한 소문은 한국에도 전해져서 [[김영삼]]이 [[금융실명제]]를 단행했을 때도 이를 언급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모든 부패가 척결된 것은 아니라서 [[삼합회]]에 대한 완벽한 척결은 단행하지 않았고, 이 때문에 삼합회가 국민당 정치인들과 연계해서 합법적(!!!)으로 [[유흥업소]]를 운영하거나(사실 국민당 [[일당독재]] 시절에 대만에서 [[매춘]]은 의외로 합법이었다) 국민당 선거운동을 돕기도 했고, 국민당이 운영하는 기업은 세금을 내지 않는 병폐 또한 있었다. 이 때문에 [[타이베이]]는 1990년대까지 [[태국]] [[방콕]]과 더불어서 아시아에서 매춘업으로 유명했던 도시였다. 타이베이가 매춘도시라는 [[꼬리표]]를 뗀 것은 [[천수이볜]]이 타이베이 시장이 된 이후로 매춘업소와 [[퇴폐]]업소에 대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