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제스/생애 (문단 편집) ==== 몰락의 책임 ==== 이렇게 당초에 장제스가 공산당을 압도할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허무하게 패배하고 만 것에는 내부적인 요인도, 외부적인 요인도 있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가 바로 '''[[물가]] 통제 실패였다'''. 8년 간의 중일전쟁을 거치면서 많은 산업시설들이 파괴되었고, 상당수의 지역이 황폐화되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 부흥을 위해서는 재건이 필수였지만 장제스 본인은 당장 [[경제]]와 [[인프라]]를 재건하기보다는 공산당을 몰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서 내전을 재개한 이후로는 재건 작업은 뒷전이 되어버렸고 전비 충당을 위해 [[화폐]]발행을 남발하는 수를 썼다. 이러니 물가가 다시금 급속히 폭등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상황에서 [[실물경제]]가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으니 [[금융]]업으로 [[돈]]이 몰려들었는데, 이러한 기형적인 상황은 [[매점매석]]과 [[투매]]가 일상화되어 물자는 부족한데 돈만 넘치는 상황으로 이어졌고 이는 물가상승을 더욱 부추기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공무원]]들이나 [[노동자]]들은 월 단위가 아닌 일 단위나 심지어 [[현물]]로 [[봉급]]을 받을 정도로 경제상황이 매우 궁핍해졌으며[* 이때의 상황이 어땠냐면 '''돈보다 [[똥]]이 훨씬 더 가치가 있었다'''. 진짜로(...). 1945년에 [[분표]] 한장 가격이 45위안이었는데 1949년에는 무려 70만 위안에 달했다. 사실 [[화학비료]]가 널리 쓰이기 이전인지라 똥이 비료로 널리 쓰였던 시절이어서 똥의 가치가 생각보다 컸고, 그래서 1950년대에 모든 화장실이 [[국영화]] 되기 이전까지는 똥을 모은 다음에 팔아치우는 일이 쏠쏠한 돈벌이 거리였다.] 이는 장제스에 대한 민심을 크게 악화시켰다. 장제스 측도 [[초인플레이션]]의 심화로 민심이 악화되어가자 물가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48년에 화폐개혁을 시행했지만([[재정경제긴급처분령]] 참조) 이러한 화폐개혁도 필수과제인 물자의 충분한 [[공급]]이 필요했는데 이런 것이 불가능한 이상 아무 소용이 없었던지라[* [[단속]]은 했지만 국민당의 지지층 가운데 하나가 [[자산가]]였던 만큼 한계가 컸고, 지지층의 분열만 일으켰다. 자산가들도 금태환 화폐개혁 당시에 돈이 휴지조각이 될까봐 제대로 협조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물가상승 문제는 [[천윈]] 등이 투기자본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나서야 해결되었다.] 결국 실패로 돌아섰고 이는 국민당과 장제스의 지지기반 상실로 이어졌던 것이었다. 이렇게 장제스에 대한 민심이 악화되면서 중국 공산당으로 민심이 쏠려버렸고, 공산당군이 초반 열세를 극복하고 국민당군과의 싸움에서 이기면서 국민당군은 맥없이 [[패배]]해버리고 말았던 것이었다. 이렇듯. 장제스 본인에게도 경제기반 재건 대신에 섣불리 공산당을 제거하려는 쪽을 택하다가 경제난으로 지지기반이 산산조각나면서 결국 패배한 것은 너무도 뼈아프게 다가온 경험이었고, 이후 꽤나 오랜 기간 동안 대만의 경제정책이 고[[금리]] 위주로 돌아갔던 것도 이러한 초인플레이션의 [[악몽]] 때문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