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일순 (문단 편집) == 생애 == [[원주시|원주]]를 대표하는 사상가 중 하나.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나 [[1994년]] 원주에서 타계했다. [[서울대학교]] 전신인 경성공업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서울대학교/역사#s-3|국대안 파동]]에 연루되어 제적되었고, 새롭게 출범한 [[서울대학교]] 미학과에 다시 입학했으나 [[6.25 전쟁]]으로 중퇴하고는 강원도로 돌아왔다. 이후 [[원주대성중학교]]·[[대성고등학교(강원)|대성고등학교]]를 설립하고, 두 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후 평소 주장해 왔던 중립화 평화 통일론이 빌미가 되어 3년 간 수감되었는데, 그 후에도 반독재 운동 배후와 빨갱이 혐의로 계속 고생했다. 그의 집 앞에 경찰이 따로 파출소를 만들어 그를 전담했을 정도. [[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념 교구로 [[원주교구]]가 설정되고, 초대 교구장 [[지학순]] 다니엘 주교의 요청으로 본격적인 [[신용협동조합|신협]] 운동과 평신도 교육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1972년]] [[남한강]] 대홍수를 계기로 지학순 주교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만들었으며, 강원도 일대 농촌과 탄광촌을 중심으로 신협 운동과 소비자 협동조합 운동과 같은 민간 주도의 사회 개발 운동을 벌였다. [[1970년]] [[정인숙 사건]]이 터진 후 [[원주문화방송]] 개국과 관련해 부정부패 규탄 시위를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장일순은 그 당시 정치 활동 정화법에 묶여 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가 없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 때는 "[[유신 헌법]]은 무효"라는 지학순 주교의 양심선언에 기여하였다. 이렇듯 장일순은 [[1970년대]] 원주 캠프의 정신적 지주였으나, 민주화 운동의 전면에 나서기보다는 드러나지 않게 일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정치 활동에 나서지 않고 후방에서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도맡았으며, 평소 난 치는 것과 잡초를 그리는 것을 즐겼고, 이를 팔아 민주화 투사들을 돕기도 했다. [[1980년대]] 원주의 '[[한살림]] 운동'을 시작하여 호를 '일속자'로 바꾸고 "하늘, 땅, 물, 공기, 사람, 벌레는 모두 한 생명"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자연을 중시하는 생명 사상 운동을 펼쳤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