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원톈 (문단 편집) === 비참한 최후 === [[파일:30436f4c74443030.jpg]] 1966년 10월 1일, 장원톈은 건국절 경축행사에 참가해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때 마오쩌둥은 환한 얼굴로 장원톈을 혁명 동지로 칭하며 그의 공헌을 칭찬했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이미 장원톈을 숙청하기로 마음 먹었고, 장원톈은 곧 문화대혁명의 광기에 직면했다. 1968년 5월 17일, 장원톈은 집에 갇혀 감시 대상으로 낙인찍혔다. 그리고 7월 12일, 중앙위원회는 장원톈을 중앙위원회 위원 직에서 제적하고 공산당에서 제명했다. 8월 9일, 장원톈은 높은 모자를 쓰고 "삼반분자(三反分子)"라고 쓰인 플랜카드를 든 채 쑨즈팡(孙冶方)과 함께 홍위병들의 욕설과 구타를 받으며 거리를 행진했다. 당시 고혈압과 심장병을 앓았던 장원톈은 그날 날씨가 무더워 견디기 힘들자 허리를 숙여 한 시간 동안 고개를 숙이다가 결국 체력이 버텨주지 않아 거꾸러졌다. 그러자 홍위병들은 그가 "죽은 척한다."고 욕하며 질질 끌고 갔다. 그렇게 5시간 동안 끌려다니는 동안 그의 옷의 단추들은 전부 뜯겨졌고 코는 시퍼래졌으며 눈은 퉁퉁 부었다.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집에 돌아온 장원톈은 부인에게 경과를 설명하면서 "오늘은 거의 죽을 뻔했다."며 탄식했다. 아내 류잉(刘英)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홍위병들에게 규탄받는 그 이를 볼때마다 하루종일 조마조마해졌고 해질녁이 됐을 때 문에 기대어 그 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장원톈은 10개월 동안 219건에 걸친 조사를 받았다. 그는 조사 때마다 욕설과 주먹질, 발길질을 당했지만 끝까지 참으며 침착한 태도로 자신을 변호했다. 캉성은 류사오치에게 불리한 증거를 얻기 위해 장원톈에게 류사오시의 '60인 반당 집단 사건'을 입증하라고 요구했지만 장원톈은 끝까지 거부했으며 그가 제공한 자료는 "61명 출소는 내가 서명한 것으로 당 중앙 지도부도 일고 있었다."라는 사실을 밝혀 캉성이 원하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캉성은 이 자료를 왜곡 해석해 "류사오치, 장원톈의 반란이 입증되었다."고 주장하며 장원톈 부부를 반역도당으로 몰아갔다. 사흘 뒤, 장원톈 부부는 문혁 전담팀의 호송을 받으며 열살 된 양녀 샤오첸과 함께 광둥성 쟈오칭군 분구로 내려가 산중턱의 단층집에 갇혔다. 장원톈은 그곳에서 '장보'라는 가명으로 불렸고 본명을 밝히는 게 금지되었고 전화를 걸지 못하고 외부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했으며 매달 군분구 보위과에 사상과 언행을 서면으로 보고해야 했다. 그후 장원톈은 매일 동쪽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산보하는 것으로 가슴 속에 품은 한을 달랬다. 그러던 1971년, 문화대혁명을 이끌던 [[린뱌오]]가 [[9.13 사건]]으로 죽어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때 71세였던 장원톈은 문화대혁명의 형세와 자신의 운명이 바뀔 것임을 직감하고 사회주의의 기본 이론을 체계적으로 기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971년 10월 12일부터 감시자들의 눈을 피하며 비밀리에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논문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무산계급 독재 하의 정치경제, 사회주의 사회에 대한 공적인 관계, 당내 투쟁, 당의 노선 정책 등을 다루었다. 그는 극좌 노선과 문화대혁명의 실책을 비판하고 중국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문제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다. 그가 본 사회주의 사회의 임무는 생산력을 키우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행위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적과 아군의 모순이라고 과장해 공산당에 지대한 위해를 초래했다고 비판했다. 1972년 4월 2일, 저우언라이 총리는 마오쩌둥에게 장원톈이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복직을 호소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에 중앙위원회는 1972년 5월부터 장원톈 부부에게 연금을 지급해주기로 결정했다. 이후 장원톈은 1974년 10월 18일에 마오쩌둥에게 서신을 보내 "중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으나 시골에선 치료할 곳이 마땅치 않으니 베이징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당시 시력을 거의 잃었던 마오쩌둥은 비서에게 편지를 낭독하게 한 뒤 주위 직원들에게 "그가 베이징에 사는 건 허용할 수 없지만 다른 곳으로 이사가도 된다."라는 지시를 작성하게 했다. 이리하여 장원톈 부부는 1975년 8월 23일 광둥을 떠나 장쑤성 우시 시로 이주했다. 장원톈은 심장병에 시달려 여러차례 병원으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았다. 그는 베이징에 가서 치료받고 싶다고 호소했지만, 마오쩌둥은 끝내 그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1976년 7월 1일 오후 7시 30분, 장원톈은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후 1979년 8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에서,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제명을 철회하고 장원톈을 추모하는 행사를 개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