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원톈 (문단 편집)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 1951년 4월, 장원톈은 초대 소련 주재 중국 대사를 맡았다. 그는 중국 대사로서 국제 정세 분석과 정책을 중앙위원회에 적극 건의했는데, 특히 1951년 [[6.25 전쟁]]과 관련해 휴전 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1954년, 장원톈은 저우언라이와 함께 제네바 회의에 참석했고 9월엔 제1차 전국인민대표대회 제1차 회의에 참석해 제1회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당선되었다. 이에 장원톈은 1955년 1월에 귀국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제1부부장을 맡아 저우언라이 총리의 외교 업무에 협조했다.뒤이어 1956년 9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후보위원에 당선되었다. 그러던 1959년 7월 2일, 장원톈은 루산회의에 참석했다. 이때 중앙군사위원회 부주석 및 국방장관 [[펑더화이]]가 [[대약진 운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보내 "1958년의 정책 집행이 너무 급했고 일부 자금을 분산시켜 일부 필수 항목을 충족시키지 못했다."며 1959년 이후에는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7월 17일에 회의 석상에서 펑더화이의 편지를 공개해 토론 의제로 채택하고 펑더화이가 당의 지도에 도전했다고 비판했으며 [[백단대전]] 때 자신의 승인을 받지 않고 일본군을 공격했던 일을 끄집어내 맹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7월 19일 후난성위원회 제1서기 주소주(周小舟)는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그는 이번 회의에서 대약진 운동의 결점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필요하며 현지 간부들의 실적 왜곡 및 성과 과장 문제는 상부의 계획이 지나치게 높은 것과 관련이 깊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정책의 이상은 위대하지만 구체적으로는 실패가 더 많고 득실이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렇듯 회의 석상에서 마오쩌둥과 펑더화이의 갈등이 불거지고 회의 참석자들 사이에서 마오쩌둥 지지세력과 펑더화이 지지세력이 충돌하던 7월 21일 오후, 장원톈이 나섰다. 그는 3시간 동안 더욱 정확한 이론 용어를 써가며 펑더화이를 지지했다. 그의 발언은 13개 항목으로 나뉘는데, 주로 대약진운동의 성과 및 결함, 문제점 분석, 주관주의와 편면성, 정치 경제 등 세가지 간의관계, 민주집중제의 결함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대약진운동의 결점을 지적하는 동시에 주관과 객관, 정신적 및 물질적 관계에 대한 이해는 단편적이라고 지적하고 정치와 경제의 관계에 대한 당국의 잘못된 인식을 지적했다. 그의 발표 도중 마오쩌둥의 추종자들이 야유를 보냈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의견을 고집했다. 이에 마오쩌둥은 반격에 나섰다. 8월 2일부터 16일까지 여산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8기 8중전회에서, 마오쩌둥은 노선 문제를 거론하며 "루산회의는 우경향 기회주의로 기울어졌다."고 비판했다. 뒤이어 [[린뱌오]]가 "펑더화이는 큰 영웅이 되기 위해 마오쩌둥을 반대하고 있다."고 몰아세웠고 다른 상무위원들도 모두 펑더화이가 당권을 찬탈하려 하고 마오쩌둥의 퇴진을 유도했다고 비판했다. 그후 8월 11일, 마오쩌둥은 펑더화이 일파를 "자산계급 민주주의자로서 공산당에참가했다."며 우경 기회주의자로 몰아세웠고 참석자들은 마오쩌둥을 비판한 펑더화이, 황극성, 장원톈, 주소주 등을 비난했다. 8월 16일, 공산당 8기 8중전회는 "당의 총노선 수호, 우경 기회주의 반대 투쟁"을 개시하기로 결정하고 펑더화이, 황극성, 장원톈, 주소주 등을 '팽황장주 반등그룹'으로 지정해 자아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후 장원톈은 8월 24일 전국 외사회의에서 비판받았고 외교부 부부장에서 해임되었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분노는 그걸로 끝나지 않았고, 장원톈은 문화대혁명 시기에 혹독한 탄압을 받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