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원톈 (문단 편집) === [[중일전쟁]] 시기 === 중일전쟁이 본격화한 직후인 1937년 8월, 장원톈은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국내외 정세를 분석한 보고서를 통해 '항일 10대 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던 1937년 11월 말 [[왕밍]], [[캉성]] 등이 모스크바에서 옌안으로 돌아와 마오쩌둥의 소극적인 항일 노선을 비판하고 일본과 적극적으로 싸우라는 스탈린의 뜻을 전달했다. 이에 장원톈은 12월에 정치국 회의를 주재해 '현재의 정치 형세와 당의 임무'를 보고했다. 이 회의를 통해 왕밍, 천윈, 캉성이 추가로 중앙위원회 위원에 편입되었고 장원톈 본인은 마오쩌둥, 왕밍과 함께 집단지도체제를 결성했다. 한편 장원톈은 1938년에 [[장칭]]과 결혼하려는 마오쩌둥의 뜻에 반대했지만 결국 막지 못했다. 장원톈은 6기 6중전회 이후 사실상 최고 지도자 지위에서 물러나 홍보 업무를 담당하는 간부 교육을 맡았으며 당 중앙서기처 서기를 겸임했다. 그러나 그는 1941년 [[환남사변]] 이후 과거 자신이 저질렀던 좌편향 오류를 여러 차례 자아비판해야 했다. 그러던 1942년 2월, 마오쩌둥이 [[정풍운동]]을 실시해 주관주의와 종파주의를 반대하며 왕밍을 비롯한 소련 유학파를 숙청했다. 장원톈은 마오쩌둥의 주장에 호응해 1년 동안 산시성 농촌을 돌며 정풍운동을 전파했다. 또한 그는 공산당 중앙조직을 개편하고 중앙서기처 주석직을 설치해 마오쩌둥을 주석에 추대함으로서 마오쩌둥이 중국 공산당의 명실상부한 1인자로 등극하도록 기여했다. 이후 장원톈은 중앙조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며 산시성 경제 발전 실태를 조사했으며 당 기관지에 국내외 정세에 관한 논평을 여러차례 게재했고 1945년 6월 엔안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대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 정치국 위원에 당선되었으며 중앙정치연구실 주임을 겸임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