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원(농업) (문단 편집) === 당나라 이후 === 당나라에서는 중앙에서 지방관리인 [[절도사]]들을 파견하였는데, 특히 무역로 거점에 있는 절도사 안녹산이 강력한 [[군벌]]이 되어 [[안사의 난]] 등의 내란이 벌어졌고, 외부에서는 [[토번]]의 힘이 강성해진 탓에, 전국토가 전쟁에 시달리며 수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이탈하여 유랑민이 되었다. 780년 당에서는 유랑농민에게 토지를 주어 세금을 거두게 하는 [[양세법]]이 실시되지만 그 이후에도 100년간 전란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당말과 [[5대10국]]의 혼란기를 거쳐 송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며 중요한 변혁을 맞는다. 우선 남북조시대부터 꾸준히 이루어졌던 일이지만, 안사의 난 이전에는 중국 인구의 2/3가량이 장강이북인 황하유역 즉 중원이나 관중/관서지역에 거주하였던 것이, 안사의 난 이후로는 강남으로의 인구 이전이 부쩍 늘어났다. 황하 인근은 토지의 침식이 많아 수분이 오래 머물지 않고 밭농사에 적합하여, 면적당 생산량은 그리 높지않고 인구밀도나 부양력도 높지 않아 대토지 경작이나 광작경영에 적합하였다. 그러나 장강이남은 양자강 하부 삼각지를 비롯해서 방조제나 관개시설을 정비하여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고, 토양 또한 벼농사에 적합하였다. 논과 논에서 재배하는 벼는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높았고, 그만큼 적은 면적의 땅에 제초나 파종 등에서 손이 많이갔다. 자연히 장강 이북과 달리 보다 적은 면적의 땅에서 5~6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효율이 좋았고 또 생산성 면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났다. 같은 면적에서 밭보다 5배 가량 생산성이 높았고, 벼를 재배하지 못하는 계절에 겨울밀이나 다른 작물을 심으면서 지력을 보존 및 회복시키는 이모작이 실시됨에 따라 굳이 지주나 호족에게 의존하지 않더라도 자기 논에서 지속적으로 생계유지가 가능했고, 북부와 달리 호족의 경제적 영향력이나 농민의 의존도도 떨어졌고, 당송변혁기에 장강이남으로의 인구 이동이 심화됨에 따라 호족의 경제적 위세가 떨어지고 가족단위로 농사를 짓는 소농의 비중이 늘어나게 된다. 중국에서 성인 남성이 경작 가능한 토지를 60~70무(畝)로 보았는데, 13세기 절강성의 온주(溫州)에서 실시된 조사에 의하면 농지 400무 이상을 소유한 집은 전체의 1.5 %에 불과하고 전체가구의 85%가 30~150무의 농지를 가지고 있는 등[* 리처드 폰 글란, <케임브리지 중국경제사>, 소와당, 2016, 404~405쪽] 당송변혁기를 거쳐 강남으로의 인구이동과 개간 및 정착이 증가하면서 장원경영이 쇠퇴하고 소농경영이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하북에서는 요, 금, 원 등이 차례로 오가면서 농촌이 사실상 파괴되었고 원명교체기의 혼란으로 명나라가 들어선 이후 1세기 동안에도 생산성을 확보하지 못해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다가, 명나라 중흥기와 이후 청나라를 거치면서 이지역도 장원보다 소토지 경작자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고 대토지 소유자가 없던 것은 아니지만 80무 이상의 토지를 소유한 자가 전체의 5%, 10%미만인데다 이들의 보유토지도 전체 농토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수준에 불과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