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영실 (문단 편집) == 본관 논쟁 == ## 토론 https://namu.wiki/thread/IdioticEntertainingOverconfidentBoard 의 합의에 의해 학술적 근거 없는 본관의 서술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장영실의 본관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불분명하다. 그러나 [[http://asanjang.kr/xe/Home/29108|아산 장씨 종친회]]를 포함한 아산 장씨 종중의 여러 단체들은 [[https://www.familysearch.org/search/catalog/1207180?availability=Family%20History%20Library|『아산장씨세보(牙山蔣氏世譜)』]]에서 '장영실이 아산 장씨의 시조 장서(蔣壻)의 9세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등 교차검증 할 수 없는 내부 족보 및 전승을 근거로 장영실이 아산 장씨라 주장하고 있다. 오늘날 [[아산시]]에는 종중에서 조성한 장영실의 묘가 있는데, 이는 시신이 안장되어 있지 않은 허묘이다. 아산과 장영실의 관계성은 『[[동국여지승람]]』에서 '장영실은 아산의 명신이다'라는 기록만이 한 줄 전하는데, 이 기록이 그의 본관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학술적으로 고증된 바 없다. [[https://kculture.or.kr/brd/board/275/L/menu/475?brdType=R&thisPage=7&bbIdx=8468&rootCate=&searchField=&searchText=&recordCnt=10|#]] 오히려 『세종실록』에서는 '장영실의 아버지가 원나라 소주(蘇州, 쑤저우) 및 항주(杭州, 항저우) 출신의 귀화인'이라고 명확히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본관을 나타내는 것이라 해석한다면 모순이 된다.[* 『[[조선왕조실록]]』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사료의 객관성이 우수한 문헌으로 꼽힌다.] 현대 대한민국에 장(蔣)씨가 아산 1본[* 과거에는 청송, 김포 등의 본관이 더 존재했으나 한반도에 뿌리내린 장씨는 시조가 장서(蔣壻)로 모두 동원(同源)이었기 때문에 현대에 단일화되었다.] 밖에 없는 것은 맞으나 중국에서는 보다 흔한 성씨이며, 이것은 귀화인에게는 문제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아산 장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장씨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는 일화에 따르면 장영실의 아버지는 실록의 기록과 다르게 원나라 출신이 아니며, 그는 사실 아산 장씨 8세손인 장성휘의 아들이라고 한다. [[http://www.sciencetimes.co.kr/?news=%EC%83%9D%EB%AA%B0%EB%85%84%EC%9D%84-%EC%95%8C-%EC%88%98-%EC%97%86%EB%8A%94-%EC%9E%A5%EC%98%81%EC%8B%A4%EC%9D%98-%EB%AF%B8%EC%8A%A4%ED%84%B0%EB%A6%AC-%EC%83%81&s=%EC%9E%A5%EC%98%81%EC%8B%A4|#]] 또 장영실의 아버지 세대는 5형제 5전판서 장성길(蔣成吉), 장성발(成發), 장성휘(成暉), 장성미(成美), 장성유(成裕)로 유명한 영남 출신의 고려의 명문이었다가 고려-조선 변천기에 급격히 몰락한 집안이며, 종친회는 아버지 세대가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던 중 이방원을 위시한 인사에 의해 숙청당하고,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가 되었다는 추리를 한다. 그리고 나머지 4형제들은 모종의 이유로 경북 산골에 숨어들어 무덤을 남겼고 그들의 후손도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져오는 데 반해, 장영실의 아버지는 장영실 이외에 알려진 후손이 없고, 그들의 무덤의 유무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상상에 근거하는 것이어서 신뢰성이 크게 떨어지며 이를 입증한 기록 등 증거는 전무하다. 종친회의 주장대로 장영실의 아버지가 '장성휘'라는 인물이 맞고 해당 인물이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면 실록에 언급이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전혀 없다. 다른 사건이면 몰라도 '역모죄'를 기록하지 않고 묻어 버리는 경우는 없다. 또한 '몰락한 가문'이라는 주장의 요지는 영실의 어머니가 관노였다는 점인데, 실제로 몰락한 가문의 가족이 관노가 되는 경우는 많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관노가 몰락한 가문인 것은 아니다. 즉 장영실의 어머니가 관노였다는 점이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는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일부 관노가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고 해서 전체 관노가 몰락한 가문 출신이라고 단정짓는 전형적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또한 엄연히 연좌의 개념이 존재하던 시기에 아무리 능력이 출중하다고 해도 역적의 직계 자손을 등용하고 직책을 내려주는 것은 당시 사회적 통념을 크게 거스르는 행위다. 종친회의 주장은 이처럼 신빙성이 없으며, 출생에 관한 기록은 정사(正史)인 실록에 장영실을 총애하고 직접 등용한 세종대왕이 직접 증언한 만큼, 해당 내용이 가장 신빙성이 높다 할 수 있다. 세종대왕이 총애하는 신하의 태생을 중국계라고 깎아내릴 이유도 없거니와, 모호한 부분이 있으면 출생이 모호하다고 했지 확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 와서 장영실의 출신이나 본관을 검증하는 것은 추가적인 문헌이 발굴되지 않는 한 불가능하며, 일부 칼럼이나 평론의 의견을 사실과 구분하지 않고 무분별하게 인용하는 것은 [[연구 부정 행위|연구 부정]]이자 [[한국의 역사왜곡|왜곡]]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