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연 (문단 편집) === 군웅할거 이후 === [[동탁]]이 집권하면서 중앙정부가 개판이 되자 장연은 부하들을 이끌고 동탁에게 반발해 일어난 군벌들과 연합하며 다시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기주목 [[한복(삼국지)#s-1|한복]]이 [[공손찬]]에게 참패했을 때는 한복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부하들을 기주로 보내 세력 확장을 시도하지만 이들이 역으로 [[원소(삼국지)|원소]]에게 털려버려서 원소의 명망만 높게 해줬다. 애초에 공손찬을 움직이게 해 한복의 힘을 약화시켰던 배후 조정자는 원소였으니, 한복의 힘이 약해진 틈을 타 기주를 약탈하던 장연 같은 세력들을 격파하면서 기주민들에게 얻은 신망과 위세를 바탕으로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게 모두 원소의 계획 안에 있었다. 장연은 철저하게 장기말로 이용당한 셈이 된다. 이때부터 원소와는 적대 플래그가 섰다. [[계교 전투]]에선 부하 장수를 보내 공손찬을 지원했으며 원소가 공손찬과의 싸움으로 정신없던 193년에는 위군의 불만세력들과 연합해 시원하게 뒤통수를 후려갈기며 잠시동안 원소군의 본거지인 [[업성|업]]을 함락시키고 원소의 가솔들을 포로로 잡는 위엄을 보인다. 공손찬과는 계교전투 무렵부터 동맹을 맺어 원소가 공손찬과 싸우면 장연이 뒤를 찌르고 또 장연과 붙으면 다시 공손찬이 뒤를 찌르는 등 집요하게 원소를 괴롭히는 형세였지만 공손찬이 [[유우(삼국지)|유우]]를 죽이는 병크를 저지르면서 내상을 심하게 입어 호흡이 맞지 않았고 그 사이에 원소에게 집중적으로 털렸다. 또 오환, 흉노의 일부 부족들과도 연합하고 있었지만 원소는 유우의 명망을 이용하고 있었고 또 장연이 신나게 털리면서 죄다 원소에게 붙어버렸다. 하지만 세력의 구성자체가 잡다한 도적떼들의 연합체였으므로 비록 숫자는 많아도 오합지졸에 지휘 체계도 제각각이라 내부 분열이 심했다. 결국 업으로 돌아온 원소에게 각개격파로 전투마다 수만 단위의 전사자를 내며 역관광 테크를 타게 된다. 193년 6월에는 장연이 직접 출진해 상산에서 원소와 격돌했다. 이 전투에서 장연과 똑같이 '[[비장#s-2]](飛將)'이란 별칭으로 불린 [[여포]]가 원소군의 부장으로 참전해 비장매치(?)가 이루어졌으나 선봉에 선 여포에게 연달아 전선이 숭숭 뚫리는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여포가 연의에서처럼 맹장이기도 했지만 병주에서 복무하다가 중앙 조정에까지 진출해 관직을 얻은 정규군 출신인만큼 체계적인 군사 훈련을 받은 인물이기에 개인의 용맹과 머릿수만 믿은 장연보다 잘 싸우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연전연승의 기세를 달리던 원소에 여포의 맹활약까지 더해져 장연은 많은 군사를 잃었지만 결정타를 주지는 못하고 10일간의 회전 끝에 서로 군을 거두어 물러난다. 장연이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했으나 이전부터 연이어 계속된 전투로 원소군의 피로가 극에 달해 사기가 바닥을 쳤으므로 장연에게 결정타를 가하지 못하고 군사를 물렸다고 한다. 이때 장연은 심심하면 십만대군을 내보내던 여느 때와는 달리 정병 수만에 기병 수천 기라는 비교적 겸손한(?) 규모의 병력을 동원했는데, 오히려 흑산의 최정예 전력으로 장연 직속의 정예병이었던 모양이다. 상산전투 이후로는 별 다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진수(역사가)|진수]]는 장연전에서 계교전투 때 공손찬을 지원했다고 적은 바로 그 다음 구절에 '원소에게 패하여 무리가 흩어졌다.'고 적었고, 여포전에서는 상산에서 장연을 격파해 인중여포 마중적토라 불렸다고 적어서 왠지 상산전투에서 장연 세력이 망한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원소전 주석에 따르면 상산전투에서 장연이 병력을 많이 잃긴 했지만 결정적인 치명타까지는 아니었고 이후로도 세력을 그럭저럭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194년 무렵부터 동맹관계에 있던 흉노, 오환 등이 슬슬 원소에게 붙기 시작하는 걸 보면 이후로도 원소에게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집요한 공격을 받으며 몰락하기 시작한 듯 싶다. 대외적으로는 확연히 찌그러들었고 수비에 급급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장홍(삼국지)#s-1|장홍]](臧洪)(195년)이나 [[국의]]의 잔당들(197년?)과 연합하는 등 원소군 내부의 불만세력들과도 연계했던 것으로 보이나 한번 털린 이후로는 원소도 이들을 신속하게 제거해버렸기에 잘 된 것이 없다. 199년,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칠 때 공손찬을 돕기 위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출병했다는 후한서 공손찬전의 기록을 보면 이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건재하긴 했던 듯.. 하지만 연락을 주고받던 사자가 붙잡혀 제대로 구원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이를 역이용한 원소의 계략에 수많은 군사를 잃고 도망쳤다고 한다. 세력이 줄이어 하향세를 타고 있던 상황에서 있는데로 모조리 긁어모아 결판을 내려다 참패한 것이니 엄청난 치명타였을 것이다. 또 진수는 이 무렵 원소가 하북 4주를 모두 평정했다고 적고 있기에 장연전에서 언급되는 무리가 와해됐다는 기록은 이 무렵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또 다시 한참 동안 기록이 없으나 원소가 병사한 뒤 하북의 혼란을 틈타 다시 세력을 키운 듯 하다. 조조가 원소의 아들들을 격파하고 기주를 평정하자 10만의 군세를 이끌고 조조에게 투항해 평북장군에 임명되었고 열후에 봉해졌다고 한다. 무섭게 상승세를 타고 있던 [[조조]]와 자웅을 겨루기에는 이미 패기가 식은 듯. [[리즈시절]]엔 군세가 백만에 달해 아예 한왕조가 포기하고 세력 내의 자치권을 인정해줄 할 정도로 강성한 군벌이었고 본격적인 군벌시대가 시작되자 하북은 물론 황하 이남 지역까지 세력 확장을 시도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며 조조에게 투항할 당시에도 군사 10만을 갖다바칠 정도였으나, [[장로(삼국지)|장로]], [[장수(삼국지)#s-1|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하면서 온갖 우대를 받았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조는 장연에게 겨우 식읍 5백 호를 내렸을 뿐이었는데, 장연은 별 불평도 없이 그냥 조용히 살다가 죽었다. 외교적으로는 기주를 침공할 때 장안에서 임명한 관리를 내세웠던 것으로 보아 [[헌제]]와 황실을 대놓고 괴뢰로 규정하던 원소를 명분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이각]], [[곽사]]와도 연합한 듯 보인다. 그 외에도 강을 건너 하북의 흑산적과 합류하려다 다른 군벌들에게 털리는 [[황건적]]의 기록이 종종 보이는데 농민반란군이라는 태생 때문인지 황건 무리와는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뒤는 아들 장방과 손자 장융이 뒤를 이었다. 증손자 장림은 [[서진]]을 섬겨 위장군을 지냈으나, 조왕 [[사마륜]]에게 삼족이 멸족되어 대가 끊겼다.[* 장림은 사마륜에게 동참했으나 1년이 되지 않아 사마륜에게 죽었다고 한다. 그러니 일종의 [[토사구팽]]인 셈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