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장안국 (문단 편집) == 평가 == 김헌창의 난과 장안국은 후세의 '''[[후삼국시대]]의 전조'''였다. 김헌창 본인이 신라 무열왕계 왕족의 대의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음에도 전후의 신라 말 [[왕위쟁탈전]]처럼 신라왕을 [[폐위]]하고 본인이 스스로 신라의 국왕을 칭했던 것이 아니라 옛 [[백제]] 지역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건립하였고 나라 이름을 신라가 아닌 독자적인 장안국 국명을 칭하였다. 이건 80년 뒤 [[견훤]], [[궁예]]와 상당히 비슷했는데 견훤도 신라인으로써 옛 백제땅에서 [[후백제|독자적인 국가]]를 건국했고, 궁예도 (자칭) 신라 [[왕족]] 출신이면서 신라 왕위가 아니라 옛 [[고구려]] 지방민의 민심을 자극해서 [[고려]]([[후고구려]]), 그리고 [[태봉|새로운 독립국]]의 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김헌창도 80년 뒤에 등장하는 [[궁예]]나 [[견훤]]도 그 자신은 삼국시대부터 쭉 신라였던 지역 출신이었지만 옛 삼국 유민의식이 본인들의 거병에 도움이 되니까 명분으로 이용했듯이 당시 지방관으로 부임하면서 옛 백제 백성들의 민심을 알았고 이를 역이용하여 [[분리주의]] 성격 반란을 일으킨 것인데, 이게 가능했던 건 삼국통일의 주체 무열왕계 왕실이 백제계 유민들의 민심을 꾸준히 회유하려 노력했고, 김헌창 자신이 그런 인연을 강조했을 개연성이 크다. 김헌창의 난과 장안국을 '''[[백제부흥운동]]의 변주'''로 여기기도 하는데 이후의 [[후백제]]와 같은 백제부흥운동과 연관될 만한 직접적 근거는 정황상 [[공주]]에서 시작했다는 지역적 근거 외에도 여럿 있어 단순 가설로 치부될 견해가 아니다. 신라사에서 최초로 아예 분리된 국가를 세우려 한 시도는 이 김헌창의 난에서의 장안국이 최초이며, 판도와 돌아가는 판세가 훗날 후삼국 시대와 거의 유사하기 때문이다.[* 황선영 저 나말여초제도사(국학자료원 발간), 충남연사문화연구원 백제사 시리즈 백제 유민편 참조.] 장안국의 규모를 보자면 훗날의 후백제에 맞먹거나 더 [[크고 아름다운]] 규모[* '''[[신라]] [[9주 5소경]]''' 중 '''5주'''(웅천, 무진, 완산, 청주, 사벌)의 도독, '''3경'''(국원소경, 서원소경, 금관소경)의 사신들, 그리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이 김헌창의 포섭 시도에 호응해 일시적으로 반란에 가담하여 장안국을 구성했다. 장안국의 강역은 80여 년 뒤 등장할 [[후백제]] 전성기 때와 비슷하거나 약간 대소동이하다. [[후백제]]는 최전성기 기준으로 무진주, 완산주는 당연히 점거한 상태였고, 청주와 웅천주는 확고하게 장악한 상태였다. 사벌주는 [[고려]]와 약 절반씩 나눠가진 상태였다. 장안국의 아성인 웅천주의 치소는 옛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이기도 하다.]였는데도 신라 중앙군이 이를 단기간에 평정하고, 한산주 등 수도에서 거리가 먼 지방의 관리들도 중앙군에 협조할 정도로 9세기 초반의 신라는 9세기 후반과 달리 강력한 지방 통제력을 가진 건실한 체제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후 신라는 사회 모순을 개혁하지 못하였고 진골 귀족 스스로 폐쇄적인 태도로 중앙 권력을 강화해 나갔지만, 그에 대항하려는 지방 [[호족(한국사)|호족]] 세력이 점차 성장하여 약 반 세기 정도가 지난 후에 후기 신라의 모순이 격화되어 마침내 후삼국시대를 초래하고 [[신라/후삼국시대|신라는 나말여초의 혼란 속에서 원신라 영역으로 축소된 끝에 결국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